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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평리이평온 Dec 11. 2023

문림(文林)의 일개 문졸(文卒)로서

아마 지난주일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이 글을 필사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 정도로 흠뻑 빠졌던 김민철 작가가 제주 함덕의 작은 책방 [만춘서점]에서 일일 책방지기를 한다는 소식에, 당일 오후 서점에 가서 갖고 있던 [모든 요일의 여행] 책에 작가님의 친필 사인을 받고 함께 사진을 찍었더란다. 아내 말로는 무기력과 우울증으로 요즘 들어 얼굴만 구기고 있던 내가, 이날처럼 하회탈 마냥 함박웃음을 짓는 것을 본 적 없더라는, 그러니까 이제는 쉰을 앞두고, 뭐든 심드렁하고, 요즘엔 업무적 스트레스까지 더해 “에효~ 죽고싶다”는 뱉어서는 안 될 말에 한숨까지 섞는 나에게 있어서, ‘모든 요일의 최고의 날’이었나 보다.


아무튼 그날, 나는 책방지기의 소임을 다하는 김민철 작가의 추천에 따라, 책을 일곱 권이나 구입하게 되었고, 나의 아이돌을 만났다는 포만감에 배불러, 딱히 샀던 책에는 관심이 두지 않은 채, 책은 일주일가량 식탁 위를 어지럽혔을 뿐이었다. 그러다 주말 늦은 오후, 흩어져 있던 책 중 하나를 들어 읽고 있다. 그리고 하루가 더 지난 오늘, 난 삼백쪽 가득 작은 글씨만 들이찬, 빽빽한 활자들이 책 읽은 공간의 공기에 휩쓸려 이리저리 누웠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는, 이 책의 반환점을 돌고 있는데......

“아! 씨! 이 책 뭐야!”라는 감탄을 읽는 내내 토해 낼 수 밖에 없었다. 


며칠 전, 나는 지난 몇 년간 나를 시름의 굴레로 인도하던, 인생 숙제 같은 글 하나를 마무리했다며 흡족해하고선, 이제는 ‘이 글을 어떻게 책으로 출간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어디선가 은혜로운 출판가가 떡하니 나타나 내게 ‘에세이스트’라는 훈장을 딱하니 달아주기를 갈구하는 상황이다. 이처럼 갈급한 내 심령을, 오늘 읽었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수놓은 화려한 문장들은, 마치 ‘작가는 아무나 되는 줄 알아? 이 정도 문필력은 되어야 작가가 되는 거지! 네가 감상에 취해 휘갈긴 어줍잖은 글 따위와 이 책의 미려한 글이 어찌 같은 산문이라는 범주에 들어갈 수 있겠어?’라며 강펀치를 날려 대는데, 리듬있고, 오묘하고, 수미상관의 문장들이 때려대는 묵직한 펀치에 이미 그로기 상태가 된 나는, 연자맷돌을 매달고 깊은 자괴감의 바다에 풍덩 빠져들어 버린, 몹시도 불행한 일요일 오후를 도서관 서가에서 보내고 있다. 새로 단장해 따뜻하고 환한 LDE 조명이 넘실대는 열람실 한 곳에서, 난 다시 두더지가 되어 나만의 토굴 깊이 숨어들어야만 한다. 읽는 동안 시도 때도 없이 감탄사를 뱉어야 했던 책은 바로 김애란 소설가의 산문집인데, 가볍고 얄팍하기 짝이 없는 독서력으로 인해 이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책을 썼는지, 어떤 문학상을 수상했는지 전혀 모르던 상태에서, 나보다 다섯 살 어린 이 작가의 관찰력과 문장력에 그야말로 압도당해서, 가위에 눌려 옴짝달싹도 못하는 악몽 속 주인공이 되어 마냥 허우적대는 것이다.


독서 중 좋은 문장을 발견하면, 기록으로 기억하고자, 문장 옆에 얇은 포스트-잇을 붙이는 습관을 들이고 있는데, 다 읽지도 않은 책 모퉁이에 이미 빽빽하게 붙여버린 무지개빛 색인에 ‘이걸 다 필사하면 책 한 권을 다 옮겨 적겠네’ 싶을 정도로 기가 질릴 정도이다. 마치 스러져가는 석양 같은 40대를 뒤안으로 밀어두고 50대에 접어들 배드민턴 동호인 모씨가, 저녁마다 셔츠에 땀이 가득 배일 정도로 운동에 용을 쓰면서, 얼마 남지 않은 40대에 꼭 A조에 올라설 것이라며, 둔한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 대지만, 유투브로 보는 BWF 대회 결승전에서 자랑스런 국가대표 왼손 에이스 서승재의 날렵한 풋워크와 풀 점퍼 후 때리는 강력한 후위 스매싱을 보고 난 후 느끼는 짜릿함과 경외감 같은 것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네이버로 검색해 본 김애란 작가는, 대학생 때 대산대학문학상 소설부문을, 2년 뒤에는 한국일보문학상을, 그 뒤로 이효석 문학상과 젊은 예술가상, 신동엽 창작상, 김유정 문학상, 젊은 작가상 대상, 이상문학상 대상, 동인문학상 등 읊은 대로 현시대 최고의 작가인 셈인데, 외람되게 지존을 몰라보고, 지존에 감히 자신을 비교해서, 지존의 문필력에 기가 죽어 자학하는 내 모습이란, 참 가소롭고 웃기기 짝이 없다.


아무튼, 그렇다. 꽤 괜찮은 글들을 읽으면, 이 문장 같은 글을 나도 따라 해야지 하는 마음이 드는데, 오늘 읽은 김애란 작가의 문장은 ‘아! 이건 나는 아무리 해도 따라 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야. 그냥 감탄만 해야지’라고 자인할 수 밖에 없는 수준이라, 다시 마음을 비우고 김애란 작가의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의 후반부를 즐겁게 읽고 있다.


이게 변방 ‘온평리파’ 일개 무졸이 침 흘리며 바라 봐야만 하는 무림 최고수들이 횡행하는 중원 ‘문림’의 세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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