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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종의 연대 Jan 19. 2023

동물을 먹는다는 것

Lori Gruen, <Ethics and Animals> 3장





우리는 먹는 행위를 생존에 불가결한 것으로 여긴다. 먹는 것은 살기 위한 것이고, 먹이는 것은 살리기 위한 것이라고 쉽게 생각한다. 그루엔의 〈윤리와 동물들 Ethics and Animals〉 3장은 먹는다는 행위에 ‘죽임’이 포함되어 있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환기시킨다. 동물을 먹는다는 것은 그 동물을 살리는 것과 병립할 수 없다. 동물은 죽은 상태로만 섭취될 수 있거나, 혹여 살아 있는 상태로 섭취된다 하더라도 그 끝은 죽음이다. 씹어서 삼키는 과정을 통과한 개체는 살아남을 수 없다. 먹는 것이 죽임을 포함한다는 명제, 혹은 거꾸로, 먹히는 것이 죽임 당하는 것을 포함한다는 명제가 인간 동물로 하여금 다른 동물들을 먹지 않도록 하는 단순하고도 명료한 근거가 된다.


저자는 사람들이 자신이 먹을 동물을 직접 죽여야 하는 상황이라면 더 쉽게 육식을 포기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로 3장을 시작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동물을 죽일 시간, 공간, 그리고 기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죽임 당하는 동물의 눈을 본다면 반감 혹은 저항감을 느낄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러한 시간적, 공간적, 그리고 심리적 비용들을 최소화하여 동물을 (직접 죽이지 않고서도) 먹을 수 있게 한 조건으로 20세기 미국에서 이루어진 산업형 농업(industrial agriculture)의 확산, 그리고 보다 직접적으로는 공장형 농장(factory farms)에서의 비인간 동물 사육과 도축의 양상을 살펴본다. 닭, 돼지, 소, 그리고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물살이의 삶과 죽음.


공장형 농장에 대한 비판들은 여러 이유에서 제기된다. 저자는 대표적으로 환경 파괴(가축 분뇨, 대기 및 수질 오염 등), 기후 변화(탄소 배출), 공중 보건(항생제 및 항균제), 전염병(각종 전염병 인큐베이터로서의 공장형 농장), 그리고 경제적인 주장들을 살펴본다. 그러나 이는 모두 인간에게 해로운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논의는 다시 문제의 핵심인 ‘먹히는 동물’로 돌아오게 된다. 대부분의 인간은 동물을 먹을 필요가 없으며, 먹는 것의 즐거움은 생명과 자유의 가치에 비견될 수 없다(most humans do not need to consume animals, and culinary pleasures don’t tend to be comparable to the values of life and liberty)(p.100). 다시 말해, 동물을 먹는 것은 미각적 쾌락을 위해 동물의 고통과 죽음이라는 값을 치를 수 있다는 명제를 체현하는 것이다.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죽임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주요하게 부각되는 고통이 문제의 전부가 아님을 상기시킨다. 고통 없이 살다가 고통 없이 죽는다면, 그리고 마찬가지로 고통 없이 살다가 고통 없이 죽을 다른 존재들에 의해 그 자리가 채워진다면 고통과 쾌락의 총량에서는 변하는 바가 없다는 논리. 공리주의의 관점에서 제시되는 이 대체가능성(replaceability) 논의에서 간과되는 것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것, 즉 각 개체가 자기의 욕망과 이익,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방향성을 가진다는 점이며, 고통이 없는 죽음이라 하더라도 결코 문제없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죽임은 한 존재가 살아 있는 동안 지녔던 가능성들을 폐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출구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저자의 논의 가운데 두 가지에 주목할 수 있다. 하나는 거리(distance)의 문제이다. 인간 동물은 인간 아닌 동물들과 충분히 가깝게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죽임 당하는지를 감각적으로 경험하기 어렵다. 만약 그들과 충분히 가깝다면, 혹은 일회적으로나마 근접 경험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자가 언급하듯 한 영화의 도살 장면에 대부분의 관객이 육체적으로 반응했던(reacts viscerally) 것처럼, 많은 인간들은 동물이 죽는 광경 앞에서 찡그리거나, 눈을 감거나, 움찔거리거나, 시선을 돌릴 것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공감하는 것은 복잡한 논리적 과정이기보다는 순간적이고 직관적이며 육체적인 과정이다.


다른 하나는 대체가능성에 대비되는, 고유성(singularity)의 문제이다. 저자는 인도적 농업에 대해 다루는 부분에서 한 인물이 유년 시절의 가족 농장을 회고하며 열 마리가 조금 넘는 수의 동물들이 각각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는 대목을 인용한다. “그들은 우리를 알고 우리도 그들을 알았어요(They knew us and we them).”(p.102) 그리고 사람들은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어떤 것도 먹지 않았다고 이야기된다. 물론 이름을 붙이는 것과 먹지 않는 것의 이러한 상관관계가 항상 성립하지는 않겠지만(p.112에는 한 여성이 Arlene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던 어린 닭을 도살하는 사례가 나온다), 각 개체가 자신의 삶을 가지는 고유한 존재라는 감각은 그들의 삶을 함부로 끝내서는 안 된다는 결정으로 직접 연결될 수 있다.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것의 범주(the category of edible)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은 하나의 희망일 수 있다. 필연과 본능만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아닌 결정과 의지가 작동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스스로 먹고자 하는 것의 범주를 정의하고 또 변경할 수 있다. 채식주의에 대한 흔한 비판인, ‘인간은 원래 육식 혹은 잡식 동물이었다’, ‘동물이 안 되면 식물도 안 된다’와 같은 조롱 섞인 주장들은, 채식주의 나아가 비거니즘이 하나의 결정이자 의지라는 사실을 넘어서지 못한다. 여기에서 인간 종이 성찰하거나 결정할 수 있는 존재임을 강조하는 것은, 다른 존재들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수한 몹쓸 짓들의 범람 가운데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이 있음을 믿고 싶기 때문이다.


동물을 먹지 않는 것은 동물을 먹고 싶지 않기 때문이며, 동물을 고통 속에 살게 하고 죽이는 일에 가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동물을 먹지 않는 것은 분명한 취향(taste)의 문제이며, 내가 느낄 수 있는 맛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설정하는가를 결정하는 문제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먹을 수 있는 것의 범주 안에 포함시키지 않듯, 인간이 인간 아닌 다른 동물을 먹을 수 있는 범주에서 제외시키는 것은 약속을 통해 이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좁은 우리 안에 갇혀 있을 때, 자기 배설물로 뒤범벅될 때, 강제 임신과 출산을 반복할 때, 기력이 쇠해 주저앉고, 마침내 극도의 공포 속에서 도살될 때, 그것이 어떤 느낌일지 우리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참고문헌:

Lori Gruen, 2011, Ethics and Animals: An Introduc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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