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산타할아버지의 존재를 믿어본 적이 없다. 계기랄 것도 없고, 처음부터 가상의 인물로 인지했다. 방송을 보고 만화 캐릭터처럼 인식했던 것 같다. 부모님은 산타 할아버지에 대한 상상을 일으킬 만한 이야기를 해주신 적도 없다. 그럼에도 해마다 크리스마스 전날이자 겨울방학식인 12월 24일 저녁이면 내가 갖고 싶어 했던 것을 선물로 주셨다.
어른이 되고 난 후로는 예수님 생일인데 신자도 아닌 내가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먹는 것도 이상하고, 연인끼리 선물을 주고받는 것도 뜬금없다는 생각을 했다. 크리스마스는 자본주의 명절일 뿐이라고 여겼는데,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는 단순한 공휴일로 넘길 수 없는 사람들임을 깨닫게 됐다.
큰 아이가 4살이 될 때까지는 크리스마스를 챙기지 않았다. 기관에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문화를 몰랐다.(내가 안 보여주고, 설명 안 해주면 끝.) 유치원에서 산타할아버지를 보게 되고, 친구들과 선생님들로부터 크리스마스 선물에 대한 말을 듣게 되자 ‘크리스마스 = 산타 할아버지 = 선물’이라는 공식이 아이의 머릿속에 만들어졌다. 선물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찬 5살 아이에게 ‘자본주의 명절을 우리가 따라야 할 이유가 없단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선물을 샀다. 속상했다. 내가 고민하고, 내 돈 들여 산 장난감을 정체도 모를 산타 할아버지의 공으로 돌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과감하게 밝히고 싶었다. ‘이거 엄마 아빠가 산 선물이야!’ 그러자니 동심을 파괴하는 듯한 미안함에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 더더욱 싫은 자본주의 명절인데, 그 상징물인 크리스마스트리는 어떻겠나. 아이의 간절한 소원에 플라스틱 트리를 샀다. 이제 트리를 사용한 지 3년 째다. 미루다가 지난 주말에 큰 애의 성화에 못 이겨 꺼냈다. 일 년 치 묵은 먼지 털어내고, 아이들한테 장식하라고 맡겼더니 집안 곳곳에 트리에서 떨어진 초록색 가짜 잎들이 어지러이 돌아다녔다. 이왕에 집에 들인 거니깐 초록색 가짜 잎이 다 떨어질 때까지 백 년 만 년 쓰는 게 도리이겠지만, 되도록이면 보고 싶지 않다.
눈엣가시 같은 가짜 잎을 보며 심란한 나와 달리, 큰 애와 작은 애는 트리에 장식을 달며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요즘 계속 싸워서 머리가 아팠는데, 오랜만에 이런 분위기가 좋았다. ‘이런 맛에 트리 장식하는 건가, 화합을 만드는 시간인가, 트리도 쓸 만하네’ 생각하고 있는데, 큰 애가 내게 말을 걸었다.
“엄마 우리 이 트리, 크리스마스 때마다 꺼내야 해. 알았지?”
‘응, 알았어.라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산타할아버지가 없다는 걸 믿을 때까지.”
“응, 알았어.” 또 한 번 별생각 없이 답했다.
그런데, 응????? 그게 무슨 말이지? 산타 할아버지가 없다는 걸 알고 있다는 말 아니야?
“너 그게 무슨 말이야? 산타할아버지가 없다고?”
아이는 순간 당황한 것 같은데, 크리스마스트리를 계속 갖고 있어야 한다고 대답을 돌렸다. 더 자세하게 묻지 않았다. 아이에게 산타 할아버지를 믿느냐, 같은 질문이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질문이 불편하다. 아이가 믿으면 어쩔 거고, 안 믿으면 어쩔 건데 싶다. 믿으면 언제까지 ‘산타의 선물’을 챙겨야 할지 고민되고, 안 믿으면 음, 얘가 이제 동심이 없어졌나, 아쉬워질 거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심이란 게 생각해보면 어른들의 환상 아닌가? 아쉬워할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자. ‘동심’이라는 말을 보면 으레 착하고 순수한 어린이의 마음을 떠올리게 되는데, 무엇을 해야 착하고 순수하다고 말하는 걸까? 예의 바르고, 질서 잘 지키고, 친구들과 원만하게 지내고, 제 할 일 잘하고, 등등 결국 두루두루 바른 행동을 일컫는다. 이런 덕목들은 어린이에 국한해서 권장되는 미덕은 아니다. 나이 상관없이 모두가 지켜야 한다. 어른도 동심을 가져야 한다. 어린아이들에게만 강조하는 걸까. 그리고 왜 그걸 산타할아버지와 연결을 지었을까? 울지 않고, 말썽 부리지 않는 착한 아이만 선물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동요가 생각난다. 오로지 어른들의 편익 추구와 구매 능력 입증(과시)을 통한 만족감을 위한 수단으로 산타 할아버지가 존재하는 게 아닌가.
한편, 동심을 자신만의 독자적인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능력이라고 해도 그렇다. 만화나 책을 보고 자신만의 세계를 꾸려나가는 게 어린아이만 가능한 일은 아니다. 어른도 공상을 통해서 캐릭터를 만들고 만화와 영화, 미술, 음악 작품을 혼자서 또는 여럿이 함께 만들어 나간다. 산타 할아버지를 믿지 않는 어른에게도 동심이 있다. 동심이 상상력, 창조력, 창의성을 뜻하는 거라면 산타할아버지를 믿고 안 믿고는 상관이 없다.
그래서 이 글의 결론은 더 이상 우리 집에 산타는 없겠지만, 선물은 있다는 것이다. 아이가 산타 할아버지를 믿는다면 믿는 대로 두지만, 내 선물을 산타의 선물로 포장하진 않겠다. 산타 할아버지가 있다면 그는 기적을 만들어 선물을 주실 것이다. 내 소관이 아니다. 대신 이제 아이에게 선물을 주는 나만의 이유를 찾아야 한다. 연말을 기념하고 새해를 축하하는 의미로 건네는 선물이다. 올 한 해 건강하게 잘 보내면서, 각각 학교, 유치원 생활 씩씩하게 잘하고,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한 아이들에게 축하 편지와 함께 선물을 줘야지. 생각만 해도 고맙네. 이렇게 생각하니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줄 수 있어서 참 기쁘다. 자본주의 명절 풍습을 지키는 게 아니고, 내가 가치 있다고 판단한 대로 행동하는 거라서 개운하다. 더 나아가서 자본주의 명절의 소비문화 대신 우리만의 스타일로 즐길 수 있도록 가족들과 고민해봐야겠다. 우리 가족만의 송년 의식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