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람(Human), 가야 할 길(道)은?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 인류가 이 우주에서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살아 왔는지, 우리가 걸어온 길을 개략적으로나마 살펴보았다. 이제 나에 대해서, 이 우주에 대해서, 그리고 나와 이 우주의 관계에 대해서 우리는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은 그럴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성현과 석학들의 이야기에 열심히 귀 기울였다. 그러나 그 결과를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명확하게 정리 되었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옅은 안개가 솔바람에 흘러가는 숲속을 산책하는 느낌이랄까 아니면 해질녘 문 앞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의 마음 같은 뭔지 묘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그런 상황에 빠져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는다고 너무 실망하지 말고, 우리가 무엇 때문에 성현과 석학들의 이야기를 살펴보았는지 생각해보자.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은 “우리가 걸어온 길”을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우리가 앞으로 걸어 가야할 길을 찾기 위해서이다. 그런 의미에서 옛 성현들의 이야기를 현대 과학을 토대로 한 사실 위주로 한번 정리해보고, 여기서부터 우리의 나아갈 방향을 찾아보도록 하자.
우선 우리를 둘러싼 우주에 대해서 먼저 정리해 보면, 지금까지 밝혀진 과학적인 사실로는 우리가 천지창조설을 믿든 믿지 않던 간에 이 우주는 빅뱅에 의해 탄생되어 계속 팽창하고 있고 언젠가는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소멸하게 될 것이며, 수백억년의 긴 시간이지만 다중우주 속에서 순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우주에 대하여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는 “우리가 관찰하는 우주는 실제로는 아무런 설계도, 목적도, 사악한 것도, 선한 것도 없이 그저 맹목적이고, 냉혹한 무관심만 존재할 때 기대할 수 있는 바로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다.”[참고 2.3]고 선언한다. 현대의 과학자가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이 우주는 누군가가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거나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2500년 전 노자의 ‘천지불인(天地不仁)’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 이러한 사실들이 우리를 베다와 불교, 노자의 ‘도’와 같은 동양의 순환론적 세계관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다음으로 이 우주 안에 살고 있는 ‘나’는 어떤가? 근현대를 사는 우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기반을 둔 서양 철학을 중심으로 교육을 받고 자라서, 이원론적 실재론으로 중무장한 사유체계를 갖고 살아가고 있다. 즉 우리는 인간의 감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물리적 사물 외에 진리, 옳고 그름 같은 이데아가 존재한다는 가정을 기초로 하는데, 형이하학적인 물리적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지만 형이상학적인 이데아 영역은 변화가 없고 영원하다는 사유이다. 이에 따라 우리의 사유체계는 모든 것이 불완전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세계가 있으면 완벽하고 절대적인 이데아의 세계가 있고, 생노병사에 시달리며 늙어가는 육체가 있으면 영원불멸하는 영혼이 있는 이원론으로 세계를 분절하여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원론적 세계관은 이미 ‘서양 철학과 소크라테스’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나와 세계가 독립적으로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내가 주체가 되는 순간, 세계는 나의 대상이 되어 내가 이 세상의 주인으로 물리적 세계의 물질을 합리적이고 실질적으로 탐구하여 나를 위한 도구로 활용하기 시작하였고, 산업화로 매진하여 서양 주도의 근현대의 과학문명을 이룩하게 된 것이다. 이는 굳이 현대 철학자 미셀 푸코의 이야기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나의 가치만을 인정하고 나를 제외한 나머지의 세계에 폭력을 가하게 되는 한계를 갖고 있다. 이에 따라 현대문명의 발전이라는 혜택의 이면에 이로 인해 필연적으로 따르는 자연 파괴의 결과로 점철되어, 오늘날 4차 산업혁명에 환호하면서도 언젠가 기후위기로 멸망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특히 나의 앞에 드러난 외부 세계는 나의 뇌가 빛 에너지에 대한 전기신호 정보를 해석해서 인식하는 내면의 세계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서양의 이원론적 실재론은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이는 형이상학의 이데아를 다룰 때 더욱 명확해지는데, 예를 들어 ‘아름다움’의 이데아는 한번 규정되면 절대적이고 본질적이고, 완벽해서 변하지 않고 영원불멸해야 하는데, 사실 이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은 시공간에 따라 계속 변화되어져 왔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노자의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천하개지미지위미, 사오이)를 소환해서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서양 철학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칸트를 거쳐 헤겔의 변증법에 이르러 마침내 일원론적 관념론으로 들어서게 된다. 이제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리의 석학들은 ‘이데아’의 사유에 머물지 말고 현상을 중심으로 붓다의 ‘제법무아(諸法無我), 제행무상(諸行無常)’처럼 물질의 세상뿐 아니라 나의 자아도 변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자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만물이 ‘제법무아(諸法無我), 제행무상(諸行無常)’인데 쓸데없이 나의 자아와 세상의 ‘본질’에 집착하지 말고 유무상생(有無相生)의 관계성으로 세상을 파악하고 이에 따라 나의 살아갈 길(道)을 찾아 가자는 것이다. 즉 노자의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 名可名 非常名(명가명 비상명)’의 관계성으로 ‘道’를 주관적인 본질에 가두어 버리지 말고 ‘道’의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제대로 끌어낼 수 있는 방향으로 살아가자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제행무상(諸行無常)’으로 끊임없이 순환하는 이 우주의 진리와 질서인 ‘다르마’를 ‘제법무아(諸法無我)’인 내가 어떻게 파악하고 실천하여 ‘범아일여’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 이는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이해하고 물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이를 좀 더 부연해서 설명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론은 인간의 모든 행위에는 목적이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즉 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행위는 건강이 목적이고, 돈을 버는 행위는 부를 목적으로 하는 행위라고 설명한다. 결국 목적은 인간의 행위가 추구하는 어떤 "좋은 것(善)"이고, 이러한 개별적인 "좋은 것(善)"들은 더 상위의 "좋은 것(善)"을 목적으로 하며, 점점 더 상위의 목적으로 올라가다 보면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최종적인 목적인 "최고선(最高善)"에 도달하게 되고, 바로 이것이 행복이라고 규정한다.[참고 3.1] 이는 바로 미셀 푸코를 소환하게 되는 한계에 봉착한다. 먼저 인간 개개인이 생각하는 "좋은 것(善)"과 "최고선(最高善)"이 지극히 주관적이어서 보편타당한 ‘행복’의 본질을 규정할 수 없다. 예를 들면 도둑이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 "좋은 것(善)"이라면 도둑의 왕이 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 버리고, "최고선(最高善)"의 기준에 따라 어떤 사람은 작은 노력만으로도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지만, 기준이 무한대로 끝이 없는 사람은 인생의 목적인 행복을 이루지 못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본질에 집착하지 말고,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처럼 세상을 관계성으로 파악하고 ‘도무수유(道無水有)’의 가르침에 따라 물의 모습을 따르면 우주의 진리와 질서인 다르마 즉 도(道)를 깨달아 이 우주와 합일을 이루는 범아일여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물은 스스로가 추구하는 어떤 목적을 설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목적에 따라 ‘저 높은 곳을 향하여’하고 외치면서 죽기 살기로 기어 올라가지 않는다. 그저 기울면 낮은 곳으로 흐르고, 그러다가 평형을 이루게 되면 멈추어 그윽한 상태를 유지한다. 그 과정에서 만물을 이롭게 하고 생(生)하게 하지만 그 결과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 하지 않는 노자의 생이불유(生而不有, Production without possession)의 전형이다. 여기에 더하여 물은 이러한 일을 할 때 자신의 고집대로 하지 않고, 우주의 질서에 따라 순리대로 처리하는 노자의 위이불시(爲而不恃, Action without self-assertion)의 가르침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물은 자기의 뜻, 자기의 목표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질서에 따라 그저 낮은 곳으로 흐르며 만물을 이롭게 하고 생(生)하게 하지만 소유하지 않고 순리대로 흘러 결국은 바다에 이른다. 여기에 “사막의 목마른 자에게 알맞은 물은 생명이지만, 바다에 빠진 자에게 너무 많은 물은 죽음이다. 도는 물과 같아서 만물이 도를 얻어 순리대로 잘 살 수도 있지만, 지나치면 오히려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라는 한비자의 교훈까지 새긴다면, 바로 이것이 우주의 진리이자 질서인 ‘도’를 따르는 것이고 ‘범아일여’의 경지일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세상을 살면서 체험적으로 감각적으로 대부분 느끼고 알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우리가 우리 인류의 생존기간 600만년 중의 99% 이상을 부족사회를 이루고 살면서 소속감을 기반으로 서로가 서로를 도와가며 평등하게 살아왔고, 이러한 소속감 즉 이타심의 원천인 ‘덕’의 유전적 재능을 현대 인류에게까지 전승하는데 성공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케네스 밀러가 그의 저서 “인간의 본능”에서 밝힌 것처럼 신화, 의식, 상징 등의 종교적 신념을 중심으로 한 사회집단화가 식량을 구하고, 전쟁을 수행하며, 자식을 양육하는데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에 진화의 자연선택에 의해 전해 내려 온 것이다.[참고 2.3]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는 불과 1%의 기간 동안에 우리의 평화로운 평등사회를 계급사회로 바꿔 버리고, 서로 유한계급(leisure class)에 들어가기 위하여 적자생존의 무한 경쟁의 수렁에 빠져 갈등과 전쟁의 혼돈사회를 만들어 버렸을까? 이의 해답은 우리가 이미 앞에서 살펴 본 “생각의 역사”를 통해 파악하고 있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를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어준 “불과 도구”를 다루게 되면서 부터이다. 불을 다루면서 우리의 뇌 크기가 급속하게 증가하여 생각의 터전이 마련되었고, 이에 따라 생각을 전략적으로 구현하게 되어 다른 동물들과 달리 필요한 도구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단순히 식량을 채집하는 단계를 넘어 식량을 직접 재배함으로서 농업생산력 증대로 이어져 잉여농산물이 발생하게 된다. 이제 이 잉여농산물을 저장해서 필요할 때마다 사용할 수 있게 됨으로서 다큐멘터리 ‘동물의 왕국’의 동물들처럼 생존을 위해 필요한 먹이를 구하기 위하여 산천을 떠돌던 우리 인류가 다른 동물과 달리 풍요롭고 여유로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 결국 각자 개인의 능력에 따라 자연스럽게 농업생산력의 차이가 나타나게 되어, 이에 따라 사유재산이 발생하게 되고 바로 이것이 권력으로 작용하는 계급사회의 시작이 된 것이다. 이는 세월이 흘러 인구가 증가하고, 사회와 기술이 발전하여 풍요로워질수록 우리의 훌륭한 유전적 재능인 ‘덕’은 마음 한구석에 쑤셔 넣어버리고, 오히려 이기심은 점점 커져 갈등과 폭력은 더욱 증폭되고,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된 것이다.
드디어 카를 야스퍼스가 그의 저서 “역사의 기원과 목표”에서 이야기한 ‘축의 시대’가 도래하였고, 예수와 소크라테스, 붓다와 공자 같은 위대한 성현들이 세상을 향해 구원의 가르침을 설파하기에 이르렀다. 이들 성현들은 우리가 마음 한구석에 버려두었던 ‘덕’을 소환하여 갈등과 폭력, 전쟁에 쓰러져가는 세상을 바로 세우고자 하였다. 예수는 ‘사랑’을, 소크라테스는 덕에 기반 한 ‘진리’를, 붓다는 ‘자비’를, 공자는 ‘인’을 대중들이 실천하며 살아가도록 가르침을 설파하였고, 심지어 예수와 소크라테스는 이를 위해 목숨까지 바쳤다. 결과적으로 현대를 사는 우리 대부분은 위 4대 성현 중 적어도 한 분 이상은 존경하고 그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왜 현실은 아직도 갈등과 폭력, 전쟁의 이기심 천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까? 아마도 성현들의 가르침을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여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데 있으리라. 그렇다면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이를 해결해야 되지 않겠는가? 우리가 누구인가? 먼저 칼 세이건의 이야기를 상기해 보자. “우리 인간은 그저 우주의 먼지만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라, 아마도 유일하게 의식과 자각을 갖게 된 우주의 일부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의식하게 된 우주다. 그리고 그 의식이 생겨나는 자리, 우주의 자기인식이 일어나는 중심부는 다름 아닌 인간의 뇌이다.”[참고 2.3] 마침내 자기 자신의 존재를 탐험하고 설명할 능력을 갖춘 유일한 생명체인 인류를 만들어낸 이 우주의 물질세계는 의문의 여지없이 자신의 역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에 직면해 버린 것이다. 우리 인류는 이미 이 우주에 생명체가 출현한 이후 5번에 걸친 대멸종도 알아냈고 그 원인도 파악하고 있으며, 대멸종 때마다 그 시대의 최상위 포식자가 전멸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알면서도 우리 인류는 6번째의 대멸종을 이끌 기후위기를 스스로 초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에 대한 대책 수립 또한 우리 모두의 ‘욕망’이라는 장벽에 가로막혀 꼼짝을 못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막다른 골목에 서있다. 게랄트 휘터의 말처럼 우리 인류의 생각에 맞게 인류의 ‘욕망’대로 세상을 제멋대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성현들의 가르침대로 우리 인류의 생각을 스스로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다.[참고 2.10] 지난 600만 년 동안 모든 생명체에게 적용되는 진화의 마지막 키워드인 ‘생존과 번식’을 위해 우리 인류의 뼛속 깊이 새겨진 ‘욕망’이 풍요로운 현대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개개인에게는 과음과식으로 건강에 해롭게 작용하고, 분노, 공격성, 불안장애 등으로 표출되고, 사회적으로는 갈등과 전쟁, 그리고 기후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욕망’이라는 장벽을 깨기 위하여 생각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와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우리 인류는 약 600만 년 전에 침팬지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이후 생존기간의 99% 이상을 모계 부족사회를 이루고 소속감을 기반으로 서로 도우며 평등하게 살았으나 ‘불과 도구’를 다루고 생각을 전략적으로 하게 되면서 더 큰 풍요를 누리게 되자, 생존기간의 불과 1%도 안 되는 아주 짧은 세월 동안에 아이러니하게도 풍요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하여 적자생존의 무한경쟁 사회를 만들어 버렸다. 그 덕분에 스스로를 닮은 로봇을 만들고, 달을 넘어 화성을 탐구할 정도로 풍요로운 세상을 구가하는 만물의 영장이 되는 영광을 얻었지만, 그사이 ‘생존과 번식’의 도구로 훌륭한 역할을 담당해온 ‘즐거움[(pleasure) : 욕망 : 행복]’은 이제 ‘생존’을 넘어 더 큰 풍요를 누리고 더 높은 유한계급(Leisure Class)에 들어가기 위하여 브레이크 없는 고속열차처럼 르카프[Le CAF(Citius Altius Fortius: 더 빨리, 더 높이, 더 빠르게)]만을 외치며 질주하고 있다. 사실 우리 인류는 수천 년 동안 풍요와 권력만을 위해 적자생존의 무한경쟁만 일삼은 건 아니었다. 한편에서는 우리의 뼛속 깊이 새겨진 ‘덕’을 소환하는 성현들의 가르침에 따라 각자가 서로 갖고 싶은 것(욕망: 행복)들을 싸우지 않고 어떻게 잘 나누어 가질 것인지에 대하여 많은 고민을 해왔다. 이에 대하여 마이클 샌델은 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사회가 정의로운지 묻는 것은,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 이를테면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 등을 어떻게 분배하는지 묻는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는 이것들을 올바르게 분배한다.”라고 사회 정의를 규정하면서 이를 이해하는 이상으로 행복, 자유, 도덕의 세 가지를 제시하였다.[참고 3.4]
사실 우리는 굳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라거나, 다윈의 진화론에서 ‘행복(즐거움: 욕망)은 더 큰 것을 얻기 위한 도구’라고 하는 말을 꺼내지 않더라도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다. 사는 동안 행복하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심지어는 현실 세상에서 뿐 아니라 죽고 난 사후의 세상(있는지 없는지 아무도 모르지만)에서도 계속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고 싶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리 모두의 희망이자 생존의 원동력이었다.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이 모두 같고, 우리가 행복한 사회를 만들었다고 해서 그 안에 살고 있는 각 개개인의 행복이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각 개개인의 능력이 다르고 각자의 주변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각 개인이 누리는 행복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마이클 샌델은 우리 모두가 원하는 행복을 서로 싸우지 않고 공정하게 잘 나누어 가지려면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도덕까지를 고려해서 다수가 공감하는 공동선을 찾는 것이 정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 생존의 원동력이었고, 이를 위해서라면 참혹한 전쟁도 불사하게 만드는 ‘행복’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보기로 하자. 행복(幸福)의 사전적 의미는 1. 생활에서 기쁨과 만족감을 느껴 흐뭇한 상태, 2. 복된 좋은 운수이다. 결국 행복이란 나의 목적을 달성하거나, 우연한 행운 등으로 욕망이 충족되어 만족감을 느껴 즐거운 상태라는 것이다. 사실 이런 사전적 의미를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각각의 개인마다 삶에 대한 생각이나 가치관은 다르지만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행복일 것이다. 이러한 ‘저마다 목적을 달성하고, 욕망이 충족되어 쾌감과 만족감을 느끼는 행복’의 메카니즘을 현대 진화 심리학자들은 모든 생명체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마지막 키워드인 “생존과 번식”의 진화론으로 설명한다. 즉 행복(만족감, 욕망)은 지금보다 더 큰 것을 이루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생존을 위해서는 먹어야하고 먹기 위해서는 원시시대 그 척박한 야생의 숲속에서 식물채집과 농사를 짓는 힘든 노력이 필요하고, 맹수들이 득실거리는 사바나에서 사냥을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사냥, 농사, 채집에 나서는 이유는 바로 먹는 쾌감과 만족감(행복) 때문 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이를 혼자 수행하는 것 보다는 여럿이 모여 상부상조하는 것이 식량을 구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는 등의 “생존과 번식”에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우리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되었고, 이에 따라 우리는 사회적으로 고립되게 되면 우울증 등 정신적, 육체적 각종문제로 “생존과 번식”에 위협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진화 심리학자들은 우리의 행복을 압축적으로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행복을 이야기할 때 개인 차원만의 행복이 아니라 여기에 더하여 사회적인 차원에서의 행복을 함께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3.1.1.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이제 행복에 대한 본격적인 여정을 떠나보자. 그럼 우리 인류가 행복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해 왔는지, 시대 순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그리고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를 통해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이야기한 행복에 대해서는 다음백과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 사상”[참고 3.1]을 중심으로 알아보기로 하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 사상은 인간의 모든 행위에는 목적이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한다. 즉 도서관에서 책을 보는 것은 지식과 정보를 목적으로 하고,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는 것은 건강을 목적으로 하는 것처럼 인간은 선(善: 인간에게 좋은 것)을 목적으로 이를 성취하기 위하여 어떤 행위를 한다. 여기서 각각의 선(善)은 더 상위의 선(善)을, 이 상위의 선(善)은 그보다 더 상위의 선(善)을 목적으로 하게 되고 이렇게 점점 더 상위의 목적으로 올라가다 보면 언젠가 최종적인 목적에 도달하게 되는 데 이것을 ‘최고선(最高善)’이라 하고 이를 행복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은 우리 인생의 ‘최고선(最高善)’이자 목적인 것이다. 이러한 선(善: 인간에게 좋은 것)에 대하여, 플라톤이 이데아와 같은 본질에 대한 진리를 탐구하였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상적이고 초월적인 선(善)보다 인간에 의해 성취 가능한 좋은 것(善)에 대한 지혜를 추구하였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도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선(善)이라는 것은 인간의 이성에 의하여 ‘훌륭함’으로 나타나는 ‘덕(德)’을 따라야 하고, 그렇게 해야만 물질적・육체적 만족을 넘어서 정신적 훌륭함까지를 포함하는 진정한 행복을 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인간의 이성이 지식과 수양을 통해 갖춘 철학적 지혜로 발현되는 ‘지성적인 덕(德)’에 더하여 인간의 욕구를 그 상황에서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고 적절하게 제어할 수 있는 실천적 지혜로 발현되는 ‘품성적인 덕(德)’을 제대로 가꾸어서 ‘고귀함’을 지향해야만 한다고 도덕적 실천행위를 강조하였다. 예를 들어 우리가 길을 지나다가 물에 빠진 사람을 발견했을 때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 사람을 구하려는 행위[선(善: 인간에게 좋은 것)]가 바로 인간의 이성 즉 ‘지성적인 덕(德)’에 따르는 것이고, 그 다음 수영도 할 줄 모르면서 무작정 물에 뛰어드는 무모한 행위를 하거나 ‘어떻게’만 외치면서 발만 동동거리는 비겁한 행위가 아닌 구조대 또는 구명튜브 등 그 상황에 맞는 적절한 방법을 찾아 그 사람을 구할 수 있도록 하는 행위가 ‘품성적인 덕(德)’을 따르는 것이며, 인간은 이러한 품성적인 덕을 통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별하고 좋은 것을 명령할 수 있으며, 실제 현실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고 적절한 ‘중용(中庸)’인지를 알게 된다. 이상과 같이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지식에 의한 이성이 반드시 행위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고, 이는 지식과 행위 사이에는 ‘의지의 나약함’이라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지성적인 덕을 기반으로 하여 실천을 방해하는 ‘의지의 나약함’을 줄이기 위하여 품성적인 덕에 따르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실천해서 습관이 되도록 함으로서 이러한 덕 있는 행위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말대로라면 우리에게는 인간으로서 이데아적인 이성이 있어 인간다운 ‘훌륭함(德)’이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이 사는 세상은 행복한 세상을 누려야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BC384~BC323)는 이 문제의 핵심이 우리 인간이 이성에 의한 지성적인 덕이 있다하더라도 ‘의지의 나약함’ 때문에 실천이 안 되는 것으로 보고 ‘품성적인 덕’으로 실천 의지를 강화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 천 년의 세상은 비록 풍요로워지기는 했지만, 서로 물고 물어뜯기는 무한 경쟁의 아수라장으로 절대 다수가 행복한 세상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세상이 되어 버렸다. 어찌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이라는 구체적인 행복 교과서에도 세상은 계속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나타난 행복에 대해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시 아테네와 스파르타 등의 그리스 도시국가들끼리는 물론 페르시아와의 끊임없는 소용돌이 속에서 철학적 지혜를 갖고 있다고 자부하는 소피스트들이 오히려 타락하고 반이성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는 깨달아서 아는 것과 이를 실천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실천 의지를 강화시키도록 노력해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중에는 그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도 있었다. 알렉산더는 서양은 물론 페르시아를 넘어 동양의 인도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시각에서 보면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정복 한 사람이기 때문에 ‘대왕’이라는 칭호를 붙여가면서 칭송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정복 왕 이요, 전쟁 왕이 아닌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윤리학을 배운 제자인데 말이다. 어찌하여 인간의 이성에 대하여 심지어 윤리학에 대하여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이 침략의 일인자가 될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무려 2,000여 년 이상이 지나, 철학사에 한 획을 그은 칸트(1724~1804)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였던 것 같다. 칸트는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자율적 존재이며, 자유롭게 행동하고 선택할 능력이 있다.”라고 선언하고, 또 칸트는 도덕론에서 “이성이란 본능·충동·욕망 등에 좌우되지 않고 스스로 도덕적 법칙을 만들어 그것에 따르도록 의지를 규정하는 능력, 올바르게 사물을 인식하는 능력을 말한다. 감성은 욕구 또는 본능을 가리키며, 그것은 이성에 의해 억제될 수 있다.”라고 말 하였다. 사실 이 내용은 플라톤이나 아르스토텔레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칸트의 말에 주목해야할 점은 이성이 우리의 의지를 언제나 지배해서 본능이나 욕망을 항상 원하는 대로 지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칸트가 이야기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내 이성이 이데아처럼 완벽해서 저절로 주어진 자연법칙만이 아니라 내 스스로 부여한 법칙에 따라 온전하게 자유롭고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을 때만이 나의 이성이 내 의지를 완전하게 지배할 수 있게 되어 본능, 즉 욕망을 내 의지대로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성이 이데아처럼 완벽하지 않아서 욕망을 의지대로 제어하지 못해, 세상이 풍요로워질수록 오히려 더욱 적자생존(適者生存)과 무위도식(無爲徒食)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고, 소크라테스 이후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는 여전하게 숙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