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대사.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이 영화는 볼 때마다 맛이 달라진다. 매번 봐도 그때마다 새롭거나, 친근해서 반갑다.
지금 와 있는 일본 도쿄. 일본공연예술협회 격인 NBS에서 3년에 한 번씩 주최하는 세계 발레 축제(the World Ballet Festival)을 보기 위해 39도의 폭염을 뚫고 왔다. 오면서 유독 생각났던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위의 대사는 공연을 보면서도 떠올랐다.
이들이 '라 바야데르'의 주인공, 니키아 역으로 무대에 구현해낸 아름다움을 곱씹으며 생각했다.
이들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고,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어서 행복하구나.
공연 성료 후 1시간을 기다려 영접. 스미르노바 여신. by Sujiney
NBS의 세계 발레 축제는 올해로 48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발레리나의 전설 마고 폰테인과 마야 플리세츠카야, 실비 길렘 등 전설의 무용수를 그 옛날부터 도쿄로 불러들였다.
올해의 라인업도 어마무시. 그 첫 무대가 누녜즈와 스미르노바였다는 것 자체가, 이 공연이 가진 힘이다.
흥미로운 부분은, NBS가 홈페이지에 밝혀놓은 공연 개요 중 다음 설명. "세계 발레 축제는 매회 세계의 내로라하는 무용수들을 초청해, 경연과 같은 공연을 펼쳐왔다"는 것이다.
기라성 같은 무용수들을 초청해 그들이 기량을 마음껏 뽐내게 한다는 것은 관객 입장에선 행운이다. 마치, 메달 수여만 하지 않을 뿐 올림픽과도 비슷하지 않을까.
누녜즈의 니키아, 스미르노바의 니키아는 사뭇 달랐다. 같은 니키아, 다른 무대. 역시 하늘 아래 같은 '라 바야데르'는 없다.
같은 작품, 다른 무대. 발레라는 언어로 이들은 나름의 아름다움을 펼쳐냈다.
출처 각 무용수의 인스타그램.
잠시 노파심에 적자면, 둘을 비교시키자는 게 글의 목적이 아님을 분명히 해둔다. 공연을 보고 인상비평으로 누가 뭘 잘했고 누가 뭘 못했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99%의 무용수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무대에 오른다. 체력 소모량이 극적으로 크고, 부상의 위험이 매순간 도사리는 게 발레 무대. 각각의 무용수들은 그래서 각자의 방식으로 아름답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누녜즈의 니키아는 짱짱한 걸크러시.
스미르노바의 니키아는 우아의 현신.
권력에 눈이 먼 우유부단의 아이콘, 남자 주인공 솔로르(Solor)가 니키아를 배신하고 공주인 감자티와 결혼을 하기로 했을 때. 그 사실을 알게 된 니키아가 추는 춤은 '라 바야데르'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다. 특히 니키아가 붉은 하렘 바지 의상을 입고 추는 솔로는 워낙 유명. 누녜즈는 이 솔로 배리에이션에서 엄청난 밸런스를 보여줬다. 그것도 두 번이다.
글리사드를 사이드로 뛰고, 온 포인트(on pointe) 즉 토슈즈 위에 왼발로 올라서서 오른다리는 레티레로 무릎까지 올려 밸런스를 잡고, 그 다리를 아티튀드로 올려서 또 밸런스. 이걸 두 번이나 반복했다. 누녜즈의 복근은 그저 장식이 아닌 것이다.
스미르노바의 경우는 이 장면을 밸런스로 멈춰있기 보다는 아 테르(a terre)로 내려오되 폴드브라와 다리를 모두 엄청나게 길게 유지하는 테크닉을 보여줬다.
둘 다 숨막히게 아름다웠다.
게다가 스미르노바의 경우, 무대에선 180cm 정도 되어보였는데 끝나고 사인회에선 170이 채 되지 않는 게 아닌가. 세상에나 마상에나. 역시 모든 발레 선생님들께서 "코어를 중심으로 하되 몸의 다른 부분들은 전부 더 늘릴 수 없을 정도로 계속 늘려야 한다"고 하시는 이유.
스타벅스 리저브 로스터리 도쿄에서. by Sujiney
몸 전체를 길게 뽑아쓰는 스미르노바의 폴드브라는 경이로웠다. 단순히 "우아하다"를 넘어, 평생을 그 아름다운 선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읽혔다.
코어 전사 누녜즈는 또 어떤가. 드라마틱한 연기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급이다. 꽃바구니 속에 독사를 숨긴 감자티의 계략으로 죽음을 맞게 되자 감자티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너가 꾸민 거지!"라는 제스처를 하는 장면. 2층에 앉아있음에도 들렸다. 누녜즈가 연기에 심취해서 내뱉은 외마디 소리.
누녜즈와 스미르노바. 이들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고,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어서 행복한 여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