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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jiney Sep 01. 2024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버틴다, 발레 '에스메랄다'

Sujiney의 발레로운 매거진 21회

시작은 음악이었다. 발레 여성 배리에이션 '에스메랄다' 이야기.

올 12월로 예정된 비너스발레학원의 첫 발표회 공고가 난 뒤, 희망 솔로 작품을 선생님에게 말씀 드려야 하는 시점이었다. 내 마음은 "너, 할 수 있겠어?"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입이 앞서나가고 있었으니.

"선생님, 저는..저기...그...있잖아요...'에...스메랄다' 해도 될까요?"

오케이 사인을 받고, 만감이 교차했다. '에스메랄다'라니.

처음 체자레 푸니(Cesare Pugni)의 음악을 우연히 듣고 가슴이 요동쳤던 10년 전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오랜 꿈의 작품.

에스메랄다와 불가분, 탬버린. by Sujiney


발레, 하면 떠오르기 마련인 예쁘고 사랑스럽고 요정같은 이미지와는 정반대인 캐릭터도 마음에 쏙 들었다. 요정도, 공주도 물론 예쁘고 아름답지만, 에스메랄다는 '쎈 언니'다. 걸크러시에 가깝다. 집시이면서 자유로운 영혼인 에스메랄다.

문학에선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쓴 <<노틀담의 꼽추>>로 잘 알려진 캐릭터.

에스메랄다를 잘 추기 위해선, 에스메랄다를 잘 알아야 한다. 바로 이 작품으로 지난해 프리 드 로잔(Prix de Lausanne) 콩쿨에서 입상한 김시현 서울예고 당시 학생은 내게 인터뷰 중 이렇게 얘기해줬다. "에스메랄다라는 캐릭터를 연구하기 위해서 책이며 자료도 많이 찾아봤어요. 집시의 역사도 공부했죠."

그리하여, 나도 시작했다.
'에스메랄다' 탐구.

콰지모도에게 물을 건네주는 에스메랄다. 위키 커먼스.


문학 작품을 기반으로 한 많은 발레 작품은 원작의 줄거리는 모티브 정도로 차용하는 경우가 많다. 발레  <<돈키호테>>의 주인공이 돈키호테가 아니듯. '에스메랄다' 역시 원작 <<노틀담의 꼽추>>에서 영감 정도를 받았다고 보는 게 맞겠다.


신체의 장애를 가졌지만 마음은 순수한 종치기 콰지모도는 발레 작품에선 존재감이 적다. 발레에선 집시 무희인 에스메랄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먼저, 간략 줄거리. 프랑스 노트르담 대성당을 배경으로 한다. 이 성당의 부 주교인 클로드(발레에선 프롤로)는 모범적인 삶을 살아오다 16세 집시 무희 에스메랄다를 보고 자기 안에 똬리를 틀고 있던 정열을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이 사제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게 된다. 자신이 키운 충복, 노트르담 성당의 종치기인 꼽추 콰지모도를 시켜 에스메랄다를 납치하고 자기의 사랑을 강요하는 것.

그러나 에스메랄다는 그 과정에서 근위대장인 페뷔스에 의해 풀려나고, 에스메랄다와 페뷔스는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이런. 페뷔스는 이미 그 당시 최고의 싱글남. 플뢰르 드 리스 라는 신분도 좋고 아름다운 약혼녀가 있다.

하지만 수많은 발레 작품의 나쁜 남자들처럼, 페뷔스는 양다리를 선택. 심지어 약혼녀에게 받은 스카프를 에스메랄다에게 선물하기까지 한다. 에스메랄다는 영문도 모르고, 플뢰르의 집안이 마련한 약혼 축하 잔치에 공연을 하도록 초대 받는다. 자기의 반려 염소와 신나게 등장했지만, 아뿔싸. 자기가 사랑하던 남자의 약혼 축하 파티일줄이야.

에스메랄다는 착하고 적극적인 여성으로 그려진다. 1막에서 교수형에 처해질 위기의 시인의 목숨을 구해주고, 위장 결혼까지 했을 정도. 하지만 얄궂은 사랑의 배신 앞에선 에스메랄다로 무너진다. 가까스로 축하 파티 춤은 마무리하긴 하지만 남은 건 절망 뿐.



페뷔스와 에스메랄다. 뒤어서 칼로 습격하는 이가 프롤로 주교. 위키커먼스.


엎친데 덮친격으로 에스메랄다는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그를 사랑한 프롤로 주교의 비뚤어진 마음 때문. 에스메랄다의 사랑을 얻을 수 없다면 차라리 그를 죽이겠다는 심산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콰지모도가 페뷔스와 에스메랄다를 돕는다. 결국 에스메랄다와 페뷔스는 (극 전개 상 다소 급작스러운 감이 없지 않고, 개연성와 핍진성은 높지 않지만) 결혼식을 올린다.

이 결혼식 장면에서 등장하는 파드되(pas de deux, 2인무)의 솔로가 우리가 오늘날 아는 에스메랄다 배리에이션이라고.

탬버린을 소품으로 사용하는 이 작품은 에스메랄다의 당당함, 자유로운 영혼 등을 보여준다. 특히나 밸런스를 잡는 부분이 많다. 버티고 또 버티는 것.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으려 했던 에스메랄다의 캐릭터를 춤으로 담아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비너스 발레학원 엄규성 원장님은 "끈적하게, 모든 음을 다 써서, 더 써도 좋으니 끈저어어어억하게 느낌을 가져가세요"라고 말씀.

전설의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의 말도 인상적. 그는 이 작품을 캐스팅하면서 이런 주문을 했다고 한다.


"사랑에 실패해본 발레리나가 에스메랄다를 맡아야 한다."


슬픔에 지지 않고 자신만의 밸런스를 잡을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였을까.


김시현 무용수의 에스메랄다. 프리 드 로잔 유튜브 캡처.


연습을 하면 할수록 느낀다. 버틴다는 것의 중요성. 그냥 끙 하고 버티는 게 아니라, 온 몸을 이용해 지탱하고 늘리고 띄우고 누르면서 버틴다는 것.

결국 나를 버티게 하는 건 내 몸이자 내 맘이라는 것. 에스메랄다를 추며 되새긴다.  

사실 이 작품을 배운다는 것만으로도 격세지감이다. 어떤 선생님은 얘기했었다. "이 작품은 너무 어려워서 성인 발레에선 할 수 없어." 눈물이 핑. 하지만, 발레 광복 후 다시 만난 '에스메랄다.' 이 어려운 작품을 풀어주시는 선생님들이 계셨고,

할렐루야 앗살람 알라이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오늘도 잘 버텼다.

내일은, 모레는 더 잘 버텨보자.

더 길게 더 끈적하게.


외로워도 슬퍼도 잘 버티다보면

언젠가 온다, 그날이.

By Suji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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