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건물 대신 ‘색’으로 기억된다
런던의 거리는 생각보다 무채색에 가깝다. 잿빛 안개가 내려앉은 하늘, 오랜 세월 때가 탄 베이지색 석조 건물, 그리고 굳게 닫힌 검은 철문들. 다소 차갑고 흐릿한 그 풍경 사이를 걷다 보면, 불쑥 시야를 강타하는 선명한 색 하나가 튀어나온다. 바로 영국의 상징, ‘빨강(Red)’이다.
빨간 2층 버스, 빨간 공중전화박스, 그리고 빨간 우체통. 처음 런던에 도착한 이들은 지도보다 먼저 이 빨간 것들을 찾는다. 모퉁이를 돌다 빨간 우체통을 마주치면 괜히 다가가 한 번 쓰다듬어 보고, 2층 버스가 지나가면 반사적으로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이상하게도 그 빨간 점들이 “여기 있어!” 하고 손을 흔들어 줄 때에야, 비로소 ‘아, 내가 진짜 영국에 왔구나’ 하는 실감이 차오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빨간 우체통은 1800년대 빅토리아 시대의 디자인을 그대로 간직한 채 아직도 사람들의 일상을 받아내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 우체통 몸통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것이 세워진 시대의 왕을 가리키는 이니셜이 또렷하게 주물로 새겨져 있다. 빅토리아 여왕의 VR(Victoria Regina), 엘리자베스 여왕의 ER(Elizabeth Regina), 그리고 찰스 국왕의 CR(Charles Rex)까지. 우체통 하나만 보아도 영국의 묵직한 시대가 읽힌다.
재미있는 것은 이 근엄한 역사의 상징물이 동네 사람들의 다정한 돌봄을 받는다는 점이다. 영국의 몇몇 마을에서는 겨울이 되면 우체통 꼭대기에 직접 털실로 짠 알록달록한 니트 모자나 스웨터를 씌워 준다. 차가운 철제 우체통이 마치 추위를 타는 동네 이웃처럼 따뜻한 온기를 입고 있는 풍경은 묘한 미소를 자아낸다.
반면, 런던의 혈관처럼 도시를 누비는 버스와 달리 빨간 전화박스는 이제 제 기능을 잃어버렸다. 내가 사는 서리(Surrey) 주의 중심, 킹스턴(Kingston) 타운센터에 가면 이 빨간 전화박스들이 줄지어 서 있는 낯선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어떤 것은 반듯하게, 어떤 것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비스듬히 기울어진 채로. 더 이상 동전을 넣고 전화를 거는 사람은 없지만, 그것들은 마치 무대에서 완전히 퇴장하지 못하고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오래된 노배우들처럼 서 있다.
우리는 낯선 도시를 여행할 때, 수많은 건물의 모양이나 복잡한 거리의 이름을 뇌에 일일이 새겨 넣지 못한다. 대신 뇌는 가장 강렬했던 색 하나를 기억의 표식처럼 꾹 찍어 남긴다. 여행이 끝난 뒤 건물의 이름은 희미해져도, 도시의 색은 그때 느꼈던 감정과 함께 오래도록 살아남는다. 찰스 디킨스의 문학 속에 등장하는 런던이 짙은 안개와 회색빛 도시 속에서 때때로 번쩍이는 붉은 상징으로 남듯 말이다. 산토리니는 눈부신 흰색과 파랑으로, 파리는 낭만적인 베이지색으로 떠오르는 것처럼, 도시는 결국 하나의 색채로 우리 안에 저장된다.
그렇다면 문득 궁금해진다.
나의 고국, 한국은 이방인들의 기억 속에 어떤 색으로 남아 있을까.
오래전부터 한국인의 정서 밑바닥에는 ‘흰색(白)’이 고요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백의민족이라 부르기도 했다. 소박한 무명 한복, 단아한 조선 백자, 그리고 숨을 쉬는 한지까지. 한국의 오랜 문화와 예술 속에는 늘 시리도록 깨끗한 흰색이 스며 있었다.
어릴 적 시골집 방안에 누워 있으면, 나무틀 사이에 발라진 창호지를 뚫고 은은한 미색의 햇빛이 스며들곤 했다. 그 빛은 영국의 쨍한 햇살처럼 눈부시거나 날카롭지 않고,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했다. 어린 나는 가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손가락에 침을 묻혀 창호지에 작은 구멍을 뚫었다가 어른들에게 호되게 혼이 나곤 했다. 손끝에 닿던 까끌까끌한 종이의 촉감과 그 틈으로 새어 들어오던 빛.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소박한 창호지의 색이 내게는 가장 깊은 ‘고향의 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를 읽다 보면, 짙은 흙빛 들판 위로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점점이 박혀 오가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영국 문학의 색이 도시의 풍경과 거대한 상징을 드러낸다면, 한국 문학 속의 흰색은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체온이자, 삶 그 자체의 색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을 처음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는 어쩌면 이 고요한 흰색보다 훨씬 더 역동적인 색이 먼저 떠오를지도 모른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때마다 거리를 붉게 물들이는 역동적인 빨강과 파랑, 그리고 24시간 잠들지 않고 번쩍이는 서울의 네온사인 불빛들.
영국과 한국, 두 세계의 경계에 서서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아본다.
회색 안갯속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런던의 단단한 빨강과, 흙먼지 날리는 들판 위에서 바람에 흩날리던 고향의 부드러운 하양.
결국 우리가 사랑하고 기억하는 도시의 색이란, 눈에 보이는 페인트 색이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맥박과 온도가 만들어낸 ‘삶의 색’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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