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묻지 않는 영국에서 배운 것, 그리고 소셜 클락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서울로 상경했을 때의 일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늘 조금 더 또렷하게 웃었다. 첫인상은 중요하니까. 말투는 부드럽게, 표정은 밝게, 나를 감싸는 포장지는 가능한 한 단정하게 유지하려 애썼다.
그때마다 인사 다음으로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질문이 있었다. “몇 학번이세요?”
그 말은 예의 바르게 돌려 말한 “몇 살이세요?”였다. 나이를 확인하고 나면, 찰나의 순간에 관계의 자리가 자연스럽게 정돈된다. 언니인지, 동생인지, 선배인지, 후배인지. 말의 높낮이와 호칭, 심지어 눈빛의 방향까지 그 질문 하나로 명확하게 결정된다.
돌이켜보면 한국 사회는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을 '어느 칸에 넣을지'를 정하는 방식에 몹시 익숙하다. 나이뿐만이 아니다. "어디 사세요?"라는 질문으로 강남인지 강북인지를 가늠하고, 나이가 어려도 항렬이 높으면 기어이 존댓말을 써야 하는 족보의 위계까지 존재한다. (나 역시 늦둥이로 태어난 탓에, 나보다 훨씬 덩치가 큰 또래 친척에게 '고모' 소리를 들으며 괜스레 서먹해졌던 웃지 못할 기억이 있다.) 보이지 않는 수많은 서랍 칸들이 있고, 우리는 그 칸 안으로 조용히 분류되어 들어간다.
영국에 처음 왔을 때 겪은 황당한 일화가 있다. 한인 사회에서 알게 된 지인 한 분이 자신의 나이를 몇 살이나 올려 사람들과 관계를 맺었다. “제가 58년 개띠입니다.” 그 말 한마디로 그는 모임에서 자연스럽게 ‘형님’의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우연한 계기로 그의 실제 나이가 들통났을 때, 관계는 순식간에 파국을 맞았다. 그를 깍듯이 형님으로 대하던 사람은 배신감에 분노했고, 결국 그 모임은 회복되지 못했다. 나는 나이를 속인 그의 행동도 의아했지만, 그렇게까지 나이를 올려 '윗자리'를 차지해야만 안심하는 한국식 위계 문화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나이를 속인다는 것은 단순한 거짓말을 넘어, 관계의 권력을 훔치는 일이었고, 그 권력의 자리가 무너지는 순간 관계도 함께 박살 나버린 것이다.
반면, 영국에서는 나이를 묻는 일이 거의 없다. 아니, 대놓고 나이를 묻는 것은 무례함에 가깝다.
마흔이 훌쩍 넘어 뒤늦게 영국에서 다시 대학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다. 내가 공부하던 상담학 강의실 안에는 갓 스무 살이 넘은 앳된 학생도 있었고, 손등에 주름이 깊게 내려앉은 백발의 할머니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나이를 묻지 않았고, 그저 동등하게 이름을 불렀다. 그 강의실 안에는 언니도, 동생도, 선배도, 어르신도 없었다. 그저 '상담학을 사랑하는 같은 반 친구들'만 존재할 뿐이었다.
처음엔 그 평평한 풍경이 참 낯설었다. 관계가 시작되기 전 무조건 나이부터 서열 정리하던 방식에 뼛속까지 익숙해져 있었으니까. 영국인들은 사람을 만날 때 "이 사람이 몇 살인가"보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먼저 궁금해한다. 그들이 자주 던지는 "What do you do?(무슨 일 하세요?)"라는 질문은 직업의 귀천을 평가하려는 잣대가 아니라, 대화의 실마리를 찾기 위한 순수한 출발점이다. 그래서 대답을 듣고 나면 늘 "Oh, interesting! (오, 흥미롭네요!)", "How did you get into that? (어쩌다 그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라며 상대의 삶 자체로 관심을 확장해 나간다. 물론 이곳 영국에도 보이지 않는 계급과 거리감이 존재하지만, 적어도 '나이'라는 숫자가 사람의 가능성을 지레 닫아버리는 문턱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더 놀라운 건, 아무도 내 나이를 묻거나 신경 쓰지 않았는데도 정작 나 혼자 끊임없이 내 나이를 의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강의실에 앉아 있을 때도, 과제를 발표할 때도 속으로 수없이 중얼거렸다. ‘이 나이에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이 나이에 주책맞게 나서는 건 아닐까?’
나이를 묻는 질문은 타인이 아니라, 내 안에서 가장 먼저 날카롭게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나이를 묻지 않는 나라에 살면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내 몸 안에 '한국의 시계'를 단단히 박아놓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심리학에는 '소셜 클락(Social Clock, 사회적 시계)'이라는 용어가 있다. 스무 살엔 대학에 가고, 서른 전엔 취업을 하고, 서른 중반엔 결혼과 출산을 해야 한다는, 사회가 암묵적으로 정해놓은 생애 주기의 시간표다. 중년에 다시 대학에 간다는 것은, 단순히 공부를 시작한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몸에 각인된 그 지독한 소셜 클락에서 조금씩 비켜 나와, 비로소 '내가 선택한 시간' 위에 서 보는 짜릿한 첫 경험이었다.
늦었다고 자책했던 시작이, 사실은 오롯이 '나에게 가장 알맞은 시간'일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처음으로 배웠다.
그리고 그 고요한 반란은 공부가 끝난 뒤에도 이어졌다.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브런치에 일주일에 세 편씩, 8개월째 나만의 리듬으로 문장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다. 여기에는 언제 등단해야 한다는 기준도, 몇 살까지 책을 내야 한다는 컷오프(Cut-off)도 없다. 그저 지금의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지금의 내 속도에 맞춰 걸어가고 있을 뿐이다. 한국식 서열의 시계를 버린다고 해서 내 삶의 시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무거운 시계를 풀고 나니, 그제야 남의 시간이 아니라 '내 시간'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요즘 한국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며칠 전, 런던의 지인들과 모인 자리에서 대학을 졸업한 자녀들의 이야기가 화두에 올랐다. 수십 군데 이력서를 넣었지만 아직 인터뷰 요청조차 없다는 짙은 한숨. 한 사람의 고백으로 시작된 그 말은 곧 그 자리에 모인 여러 가정의 공통된 기다림임을 알게 되었다. 조용했지만, 그 안에는 시대의 변화를 견뎌내는 부모들의 애틋한 마음들이 겹쳐 있었다.
요즘은 졸업을 해도 바로 일을 시작하기 어렵고, 취업을 해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퇴사하는 청년들이 수두룩하다. 결혼은 점점 늦어지고, 아예 비혼을 선택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이력서의 공백기와 늦어지는 독립 앞에서, 이제는 누군가의 삶을 함부로 “제때를 놓쳤다”거나 “늦었다”라고 평가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취업은 했어?" "결혼은 언제 할 거니?" 명절마다 날아들던 이 질문들이 이제는 금기어처럼 조심스러워진 것도, 과거의 획일적인 소셜 클락이 고장 나고 해체되어 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사회의 시간표를 곁눈질하며 살아가지만, 그 시간표의 잉크는 예전처럼 또렷하지 않다. 다들 자신만의 속도로 걷고 있기에 더 자주 흔들리고, 불안해하며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지금, 제시간에 잘 살고 있는 걸까?’
하지만, 영국의 낯선 교실에서 나와 나이가 전혀 다른 친구들과 부대끼며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어쩌면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애초에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타인이 맞춰놓은 알람 시계를 보며 조급해할 것이 아니라, 고요히 내 발밑을 내려다보며 진짜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지금, 나는 누구의 시간 위에 서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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