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벽은 높고, 나는 여전히 떨고 있다

<오데스칼키 성> 두려움이 쌓아 올린 ‘괜찮은 척’의 두께에 대하여

by 양수경


1. 고립을 선택한 권력의 높이


숙소 옆으로 난 가파른 언덕길을 오른다. 이탈리아 브라차노 호수 위에 우뚝 솟은 오데스칼키 성(Castello Orsini-Odescalchi)을 향하는 길이다. 실제 경사는 45도쯤일까, 아니 내 심장이 느끼는 체감 각도는 60도에 가깝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니 비로소 불필요한 말수가 줄어든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거친 숨소리 너머 숲 속 새들의 재잘거림은 지독히도 평화롭다. 문득 궁금해진다. 이 평화로운 세상에서 권력은 왜 그토록 ‘높이’와 결혼하려 안달했던 걸까. 나는 성을 향해 오르며 위를 보기보다, 발밑의 땅을 정직하게 딛으며 묵묵히 걷는다.


15분 정도 숨 가쁘게 걸어 드디어 성 앞에 섰다. 수백 년 전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쌓아 올린 그 무지막지한 두께의 성벽을 마주하는 순간,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진짜 철벽이구나.”


성벽은 오랜 세월 비바람을 견뎌낸 짙은 회색빛이다. 습기가 머문 자리마다 군데군데 이끼가 덮여 있고, 마모된 돌 틈 사이로는 손톱만 한 작은 나무들이 기적처럼 뿌리를 내리고 있다.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브라차노 호수는 눈이 시릴 만큼 푸르다. 햇빛에 부서지는 윤슬이 하얀 안개처럼 눈부시게 평화롭지만, 동시에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함에 뒷걸음질 치게 된다. 1400년대, 로마로 향하는 길목을 지키기 위해 이 성을 세운 성주 나폴레오네 오르시니의 마음도 이처럼 매 순간 평화와 공포 사이를 오갔을까.


올리브 나무 너머로 오데칼키성이 보였다.
올라가는 길은 가팔랐고, 호수는 그 아래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윤슬을 흔들고 있었다.
지키기 위해 쌓은 벽이, 어느 순간 자신을 가두는 모양이 되기도 한다.


2. ‘괜찮은 척’이라는 성벽의 두께


손바닥으로 차가운 성벽을 쓸어보았다. 손끝에 서늘한 냉기가 먼저 닿는다. 이 견고한 벽을 바라보며 나는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중년의 나이에 다시 영국에서 거의 10년에 가까운 시간을 배움에 쏟아붓고, 상담사로 일하며, 누군가의 엄마로 살아오는 동안 나 역시 적지 않은 벽을 쌓아왔기 때문이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나약함을 들키지 않으려고. 무너지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어쩌면 우리가 두려움 앞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무기를 드는 일이 아니라 벽을 세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잊히지 않으려고, 실패하지 않으려고, 흔들리지 않으려고 우리는 ‘통제’라는 이름의 돌을 한 장 한 장 쌓아 올린다. 영화 〈블랙 스완〉의 니나가 발가락이 짓물러 터질 때까지 토슈즈를 조여 매며 완벽에 집착했던 것처럼. 그러나 성벽은 높아질수록 안쪽을 더 어둡게 만든다. 견고해질수록 그 안의 사람은 더 깊이 고립된다. 통제는 나를 지켜주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 나를 가두는 방식이 된다.


지키기 위해 만든 구조물 안에서, 나는 오히려 내 안의 갇힌 마음을 보았다.
총안구는 창문이 아니라, 두려움의 눈이었다.


3. 방패이자 감옥인 마음의 성벽


성 안으로 들어서자 공기가 한층 더 서늘해진다. 적의 침입을 살피기 위해 뚫어놓은 좁은 구멍, 총안구로 밖을 내다보았다. 바깥에는 호수가 한없이 평화롭게 펼쳐져 있는데, 안쪽의 시선은 늘 누군가의 침입을 상정하고 있었다. 같은 풍경도 어느 자리에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을 갖게 된다.


인간도 그렇다. 두려움을 느낄 때 본능적으로 마음의 성벽을 쌓는다. 상처 입지 않기 위해 감정을 차단하고,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고립을 선택한다. 하지만 성벽은 나를 지켜주는 방패이면서 동시에 나를 가두는 감옥이기도 하다.


무기 전시실에 들어서자 중세의 철갑옷들이 서늘한 자태로 서 있었다. 내 키보다 큰 장총과 활을 바라보며, 그것을 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근육이 비명을 질렀을지 잠시 상상해 보았다. 그 육중한 무게는 곧 두려움의 무게였을 것이다. 두려움은 대개 지킬 것이 있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생명을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 사랑하는 것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 인간은 그 불안을 견디기 위해 거대한 무기를 만들고, 더 두꺼운 벽을 세운다.


이 방에 놓인 것은 무기들이었지만, 내가 본 것은 두려움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낸 정교한 형태들이었다.


4. 불완전한 자유를 향해 성문을 열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 탁 트인 테라스로 나갔다. 그곳에서 나는 두 갈래의 삶을 떠올렸다. 하나는 성벽 안에 숨어 죽음과 상처를 외면한 채 가짜 평화를 누리는 삶이다. 다른 하나는 성벽 밖으로 걸어 나가 비바람을 맞더라도 진짜 자유를 만나는 삶이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우리가 죽음이라는 진실을 외면하기 위해 세상의 소음 속으로 숨어드는 것을 경계했다. 반면 고흐는 병원의 차가운 벽에 갇혀서도 그 벽 너머의 밤하늘을 보며 눈부신 별을 그렸다. 하이데거가 성벽을 깨고 나오라고 외쳤다면, 고흐는 성벽에 갇혀서도 그 너머를 꿈꾸는 법을 보여주었다.


나는 그 사이 어디쯤에 서 있는가. 상처받을까 두려워 ‘괜찮은 척’의 성벽 안에 웅크리고 있는가. 아니면 떨리는 다리로라도 성문을 열고 호숫가로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는가. 어쩌면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두꺼운 돌벽이 아니라, 그 벽 너머를 향해 손을 내미는 용기인지도 모른다.


브라차노 호수 위로 윤슬이 번졌다. 성벽이 가르쳐주지 못한 평화가 물 위에서 먼저 반짝이고 있었다.
높이 올라온 끝에 만난 것은 더 큰 방어가 아니라 더 큰 하늘이었다.
지붕들은 다정하게 겹쳐 있었고, 세상은 생각보다 덜 위협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5. 여백 속에서 숨 쉬는 진짜 나


성 안의 화려한 천장화와 벽화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과거의 성주들은 왜 전쟁과 독살의 위협 속에서도 이토록 아름다운 그림들에 집착했을까. 외부의 위협이 거셀수록 인간은 영원하고 아름다운 것에 더 매달린다. 공포를 견디기 위해 그것을 예술의 언어로 바꾸려는 것이다.


성 주변의 우산소나무(Stone Pine)들이 눈에 들어왔다. 길쭉한 줄기 끝에 둥글게 퍼진 잎들은 하늘을 향해 펼친 초록 손바닥처럼 보였다. 돌벽 사이를 비집고 자라난 노란 이끼조차 황금빛 생명력을 품고 있었다. 1400년대 이곳에서 활을 쏘던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지키고 싶었을까. 권력이었을까. 생존이었을까. 아니면 두려움 속에서도 끝내 잃고 싶지 않았던 자기 삶의 어떤 조각이었을까.


나는 다시 브라차노 성의 단단한 벽을 손으로 쓸어보며, 나 자신에게 조용히 말을 건넨다.


“괜찮아. 성벽의 돌 하나가 빠진다고 해서 네 세상이 무너지지는 않아.”


두려움은 빛이 들어오기 직전의 어스름인지도 모른다. 완벽한 흑조가 되기 위해 끝내 자신을 찔러버린 니나의 비극 대신, 나는 불완전한 채로 성문을 열고 호숫가로 내려가는 자유를 택하고 싶다. 신이 남겨두신 틈과 여백 속에서야 비로소 진짜 내가 숨을 쉴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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