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게 망친 여행이 평생 기억에 남는 이유

나폴리 공항에서 렌터카를 못 빌린 밤

by 양수경


전업주부에게 집은 휴식처가 아니라 치열한 ‘일터’다. 남편과 자녀에게는 편안하게 돌아올 둥지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매일 밥을 짓고 치우며 쓸고 닦아야 하는 무한 노동의 현장이다. 그러니 주부에게 진짜 여행이란,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라는 무거운 직함을 내려놓고 내가 누구인지 잠시 잊어버리는 완벽한 도피를 의미한다.


밤 11시, 이탈리아 나폴리 공항. 나와 대학 동창들은 마침내 그 완벽한 도피처에 도착했다. 이 여행을 위해 우리는 무려 5년 동안 매달 꼬박꼬박 곗돈을 부었다. "야호, 나도 중년이야! 이제 자유야!" 주방을 탈출한 우리는 쾌재를 불렀고, 영어 좀 한다는 나만 철떡 같이 믿고 따라온 친구들의 얼굴엔 아말피의 푸른 바다만큼이나 눈부신 기대감이 넘실거렸다.


하지만 그 찬란했던 환상은 공항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삐걱거렸다. 폼페이 폐허 근처의 상업 도시 나폴리는 우리가 상상한 낭만적인 이탈리아와는 거리가 멀었다. 설상가상으로 렌터카 대여소는 공항 안에 있지도 않았다. 우리는 울퉁불퉁한 돌길 위로 캐리어를 덜컹거리며 끌고, 표지판을 더듬어가며 간신히 대여소에 도착했다.


예약자인 내 이름을 당당하게 말하자, 카운터 직원이 고개를 쓱 들며 무심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Driving licence?”


그 짧은 한 문장이 모든 걸 무너뜨렸다. 예약자는 내 이름, 결제한 카드도 내 지갑에 있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내 면허증이 없었다! 내 머릿속의 회로가 일순간 정지했고,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는 황급히 내 여권을 들이밀고 "내 신분은 이걸로 증명할 테니, 운전은 국제면허증이 있는 내 친구들이 하면 안 될까?"라며 사정했다.


직원은 어깨를 으쓱하며 단호하게 안 된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엔 미터기 올라가는 소리가 시한폭탄처럼 터지기 시작했다. '오늘 밤 아말피 숙소 노쇼(No-show) 비용, 예약금으로 이미 날린 돈, 당장 현장에서 새로 빌려야 할 1500유로….'


5년을 모은 우리의 피 같은 곗돈이 이탈리아 허공에서 바사삭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부킹닷컴에 보낸 메일은 야속하게도 답이 없었고, 400유로면 충분했던 일주일 렌트비는 현장에서 빌리려 하니 무려 1500유로 이상으로 훌쩍 뛰어 있었다.


56daa836da74bb8e900541e1c4b14b1c76b4415d14f8fd2ef7287d6ac0115f2e.png


그럼, 우리의 5년짜리 여행은 시작도 전에 완벽하게 실패한 것일까?


우리는 종종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고, 계획한 일정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실행되며, 예산 안에서 효율적으로 돈을 쓰는 것만이 '성공한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그 기준대로라면 그날 나폴리의 밤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대실패다.


김영하 작가는 책 <여행의 이유>에서, 여행의 본질이란 '성공을 목적으로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으며 성장하고 돌아오는 것'이라고 했다. 결국 여행의 진짜 목적은 엑셀 표에 적힌 일정표를 완수하는 것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경험을 사는 것’이다. 그 경험은 때로는 나폴리의 밤처럼 눈물 쏙 빠지게 맵기도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엉망진창의 경험들조차 결국 내 삶을 한 뼘 더 풍요롭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5c4e932c7f0678221a97e9603f0fcb67d3a6a44954571ccec1df97156f51a2d2.png


돌이켜보면 내 인생의 여행 중 가장 거대하게 돈을 잃었던, 그래서 역설적으로 내 세계를 가장 넓혀주었던 여행이 하나 있다. 바로 1997년의 중국 기차 여행이다. 심양에서 출발해 상해로 향하던 88호 기차. 무려 30시간이 넘게 걸리는 2등석 침대칸은 몸을 조금만 뒤척여도 바닥으로 굴러 떨어질 듯 비좁았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열차 바닥엔 사람들이 까먹고 버린 호박씨가 카펫처럼 수북하게 깔려 있었고, 세면대는 내 얼굴보다 작았다.


하지만 나는 그 비좁고 퀴퀴한 열차 안에서, 중국 문학 책을 읽을 때마다 늘 의문이었던 그들의 '삶'을 비로소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위화(余華) 같은 작가들의 소설 속에 단골로 등장하는, 춘절에 고향을 가기 위해 무려 2주씩 휴가를 내고 기차에 오르는 사람들의 이야기. 책으로 읽을 땐 그저 '대륙의 스케일'이거니 했던 그 거대한 민족 대이동의 고단함과 인내를, 나는 그 열차 안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온몸으로 깨달았다.


물론 그 여행의 결말이 문학적 낭만으로만 끝난 것은 아니었다. 상해에 도착해 어느 호텔 화장실에서 대충 세수를 하고 만난 무역회사. 나는 그곳에서 야심 차게 1 컨테이너 물량의 계약을 맺고 완불까지 마쳤건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회사가 고의로 부도를 내버렸다. 내 피 같은 돈은 이번 이탈리아 렌터카 비용 따위와는 감히 비교도 안 될 만큼 거대한 스케일로 공중분해 되고 말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뼈아픈 사기를 당했고, 가장 지독한 육체적 고단함을 겪었던 여행. 하지만 나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여행을 절대 '실패'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 뜨겁고 혼란스러웠던 중국의 기차 안에서 내가 얻은 문화적 이해와 사람에 대한 통찰은, 내가 잃어버린 컨테이너 한 대 값보다 훨씬 더 깊게 내 인생의 지평을 넓혀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돈을 잃은 순간을 '실패'라고만 부르는 걸까. 잃어버린 돈의 크기만큼, 삶의 다른 여백이 채워지고 있었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a7d04e6bde137bcfd412c768bcab68adad5ac5bd1ab11d7ac5533e00a7103d31.png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와 보자. 나폴리에서 영혼과 지갑을 털린 우리는 하루 만에 아말피를 떠나 시칠리아로 도망치듯 향했다. 하지만 시칠리아라고 우리를 우아하게 품어주진 않았다. 갑자기 에트나 화산이 폭발해 화산재를 뒤집어쓰는가 하면, 목숨(?)을 건 대환장 에피소드도 탄생했다.


토레 칼두라(Torre Caldura) 근처 해변에서 저쪽 너머의 해변으로 건너가려던 참이었다. 야속하게도 백사장이 하나로 이어져 있지 않자, 우리는 원피스 자락을 허벅지까지 걷어붙이고 핸드폰과 가방을 머리 위로 번쩍 든 채 바닷물로 첨벙첨벙 뛰어들었다. 마치 홍해를 건너는 모세처럼 비장하게 말이다.


하지만 미끄러운 바위를 밟는 순간, 한 친구가 요란한 물보라와 함께 꽈당 고꾸라졌다. 머리 위로 사수했던 핸드폰은 짠 소금물에 잠수하셨고, 고이 모셔둔 여권은 푹 절여져 바위 위에서 미역처럼 널어 말려야 했다.


그런데 이 처참한 재난을 완벽한 ‘코미디’로 만든 건 그다음이었다.


생쥐 꼴을 하고 고개를 들어보니, 우리가 방금 전 물살을 가르며 건너려던 그 해변은 바로 위쪽 호텔 산책로를 통해 아주 우아하고 뽀송뽀송하게 걸어갈 수 있도록 완벽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안내판 하나 보지 않고 바다로 뛰어든 중년 여인들의 촌극. 우리는 짠물이 뚝뚝 떨어지는 서로의 몰골을 쳐다보며 그 자리에서 배를 잡고 미친 듯이 웃어댔다. 유로를 허공에 날렸던 나폴리의 우울함마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지금도 모일 때마다 나폴리 공항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멘붕을 이야기한다. 화산재를 뒤집어쓰고 소금물에 여권을 적셨던 그 에피소드들을 꺼내며 숨이 넘어가게 웃는다. 만약 우리의 여행이 엑셀 표에 적힌 일정대로, 티끌 하나 없이 완벽하게 흘러갔다면 어땠을까? 아마 이토록 오래, 이토록 선명하게 우리의 기억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여행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낯선 환경에 던져져 길을 잃었을 때 비로소 내가 몰랐던 새로운 길이 열린다. 우리는 그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내가 계획한 완벽한 삶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완벽하지 않음'이 내 삶을 얼마나 독창적(Unique)이고 유쾌하게 만들어 주는지 온몸으로 경험했다.


예측을 벗어났기에 새로운 세상을 이해하게 되었고, 돈은 잃었지만 진짜 웃음을 얻었다. 우리의 여행은 그토록 완벽하게 망가졌기에, 우리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고 유쾌하게 기억되는 '진짜 여행'이 되었다.







#여행에세이#여행실수#여행에피소드#여행이야기#여행의 이유#여행에서 배운 것#나폴리여행#아말피여행#이탈리아여행#시칠리아여행#여행철학#인생에세이#중년여행#여자들 여행#우정여행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