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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지 Feb 12. 2017

오세요, 응암동

잘 마른 빨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오전 재택 근무가 있는 날이지만 기분 좋게 일어났다. 커텐에 햇빛이 부드럽게 서려있었다. 어제 널어놓은 수건도 보송보송하게 말랐다. 볕 하나로 일상이 이렇게 바뀔 수 있구나 새삼 깨닫는다. 


이사 오기 전 살았던 공덕동은 늘 축축하고 어두웠다. 일주일 널어놓아도 마르지 않는 빨래, 어쩐지 꿉꿉한 이불, 분명 아침인데도 컴컴한 방. 눈을 뜨자 마자 마주한 풍경은 나의 위치를 적나라하게 보여줬고 하루의 시작은 늘 우울했다. 그 방의 공기처럼 늘 축축한 기분이었다. 


볕이 잘 드는 방.


주말이면 잔뜩 물 먹은 이불솜 같이 무거운 몸을 웅크리고 하루종일 누워있었다. 그나마 의욕이 있는 날엔 하릴없이 거리를 싸돌아다니며 최대한 늦게 집에 들어갔다. 일하다 스트레스를 잔뜩 받고 퇴근한 날엔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우울한 공간에서 또 다시 우울한 공간으로 옮겨가는 것이 싫었다. 괜시리 친구 집에 가 배달음식을 시켜먹고,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다 다 늦은 시간이 돼서야 들어갔다. 


집에 대한 추억이 있는 사람과의 관계가 어그러졌을 땐 더 심했다. 이사 오기 직전의 일이다. 공간의 구석구석을 마주하는 일이 괴로웠다. 가장 내밀하고 사적인 공간에서조차 도망쳐야 하는 상황. 벼랑 끝에 몰려있던 그때는 매일 베갯잇에 축축한 눈물을 한바가지씩 쏟아내고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집으로 닿기 위해 그 높고 높은 언덕을 오르는 것이 참을 수 없을만큼 버거웠다. 


결국 계약 만료 일자를 한달이나 남겨두고 서둘러 집을 옮겼다. 즐거움보다 괴로움이 앞서던, 2년 간의 공덕동 생활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볕이 잘 드는 방.


공덕동에 살 때 어느 카피라이터의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다. 신혼집으로 정착한 망원동에 대한 애정이 꼼꼼하게 적혀있는 글이었다. 고향이라던지 유년시절을 보낸 동네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있는 글은 많이 봤어도 새롭게 정착한 곳을 그토록 따뜻하게 바라보는 글은 처음이었다. 한줄 한줄 읽어내려가며 참 부럽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렇게 사랑할 공간이, 서울에 있었으면 했다. 


그 에세이처럼 읽는 사람에게도 한눈에 그려지게 이 동네를 잘 설명할 순 없지만 지금 내겐 응암동이 그렇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동네보다 집이 마음에 드는 건데, 어쩐지 나는 내가 머문 집에 대한 이미지를 곧 동네에 대한 이미지로 치환하는 편이다.


볕이 잘 드는 곳, 높지도 낮지도 않은 건물 덕분에 예쁜 하늘을 볼 수 있는 곳,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여유가 생기는 곳, 화려하진 않지만 곧게 뻗은 천변 산책로가 있는 곳, 어쩐지 촌스럽지만 둥글둥글한 모양 때문에 소리 내어 그 이름을 말할 때마다 정감이 가는 곳. 


오후 출근한 날 점심으로 만들어 먹은 덮밥.
이건 사온 빵이다. 이런 걸 직접 만들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어느 주말.


이젠 돌고 돌아 집에 오지 않는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집에서 요리를 하며 기분을 풀고, 가끔 저녁 하늘을 찍는다. 이 집, 그리고 응암동이라는 공간이 주는 평안이 있다. 이사하는 과정에서 만만찮게 지쳤고 결국 적당히 거처를 골랐는데 뜻밖의 만족감을 얻는 중이다.  


이곳에 정착한 지 이제 겨우 두 달, 언젠가 그 에세이처럼 내가 사랑하는 이 동네를 꼼꼼히 설명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세요, 응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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