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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지 May 17. 2017

170517



가끔 회사 계정 프로필 문구를 바꾼다. PC로 기사를 끝까지 읽거나 기자 이름을 클릭하는 독자에게나 닿는 글이고, 어쩐지 날 포장하는 일 같아 낯간지럽지만 소개하고픈 문장을 만나면 프로필에 옮긴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땐 ‘낙관의 단서’라고 적었다. “인간에 대한 절망도 있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낙관의 단서를 얻을 수 있는 건 또 인간뿐”이라는 김중배 선생의 말에서 빌려왔다.


쉽게 비관하지도, 낙관하지도 않으면서 성실히 이 세계와 인간의 가능성을 좇는 게 기자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겐 저 짧은 문장이 그렇게 읽혔다. 그런 자세로 일하고 싶었다. 최근엔 ‘낙관의 단서’ 앞에 박준 시인의 문장을 덧붙였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일을 하다보면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대신, 업무의 특수성 때문에 직접 얼굴을 맞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전화로 낯선이와 이야길 나누다보니 종종 뜻하지 않은 상처를 주고받는다. ‘아’ 다르고 ‘어’ 다른데 오로지 말로 모든 생각을 전하다보면 필연적으로 이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개인적으론 엉망진창인 문장을 수정하는 것보다 필자와 의견을 조율해가는 과정이 훨씬 어렵다. 저 문장을 덧붙인 건 그래서다. 비록 사람과 사람 사이는 어긋나고 파열음이 생기더라도, 글엔 그런 갈등의 흔적이 남지 않길 바랐다.


편집자가 아닌 필자일 때도 마찬가지다. 현실에서 내 글을 읽는 독자들과 내가 낯설고 데면한 관계 혹은 서로 등돌리고 있는 사이라 하더라도 글만은 어떠한 편견없이 닿길 바랐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작년 이맘 땐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을 다루며 한참 앓았다. 미움 받는 일에 취약한 성격도 한몫했다. 참 별 거 아닌데, 내가 쓴 글에 대해 상상치 못한 피드백이 돌아오는 것을 보며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았다. 여성이 겪는 일상적 불안, 고통, 위험을 말하는 것자체를 공격으로 규정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머리를 싸맸다. '글을 통한 아름다운 만남'은 참 어려웠다.


일한 지 일년이 지났는데 독자와의 간극을 확인하는 일은 여전히 버겁다. 작년 이맘 때 그 막막함, 무력감을 다시 느끼고 있다. 앞으로 또 어떤 일이 이어질까. 고작 일년만에 지쳐버린 나는, '낙관의 단서'를 계속 좇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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