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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지 Sep 11. 2017

170907



나는 사소한, 그래서 구체적인 것들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심지어 가장 좋아하는 영화나 소설도 제멋대로 기억한다. 처음엔 기억해야 하는 것들을 선별하고 나머지는 몽땅 버리는, 지극히 효율적인 버릇 때문에 그런 것 아닐까 생각했는데 압박이 덜한 시공간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걸 깨닫고 정말 뇌 어딘가가 삐걱대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갑자기 그런 불안이 훅 덮쳐와 괜히 스마트폰을 멀리한 적도 있다. 나는 스마트폰을 오래 사용하면 사고가 단순해지고 멍청해진다는 단순하고 멍청한 건강 기사를 약간 맹신했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약간 마음이 놓이게 된 건 어느 카피라이터의 에세이를 읽고 나서다. 그도 나처럼 좋아하는 소설의 내용을 종종 까먹는다고 했다. 물론 그 뒤로 '그렇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책을 반복해 읽으며 기억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이 이어졌지만. 게으르고 의지박약인 나는 그렇게까진 하지 못한다. 그래도 가끔 의도적으로 무언갈 기억하려고 연습한다. 서점에서 책을 뒤적이다 가수 이랑의 에세이집 앞부분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는 남의 대화를 종종 엿듣고 기록한다고 했다. 시덥지 않은 그 기록이 어떤 창작물의 바탕이 될 때도 있단다. 


오늘은 떠나는 사람의 하얀 블라우스(더 정확히 말하자면 목 둘레 부분에 작은 프릴이 있는)와 길고양이 오른쪽 뒷다리에 있는 까만 얼룩, 빌라 어느 곳에서 들려오는 그릇 달그락 거리는 소리를 기억했다. 며칠 전 새벽엔 여름에 바른 빨간 매니큐어를 지웠고 여전히 붉은 발끝의 모습을 오래도록 보았다. 영 쓸모 없는 것들이지만, 이 덕에 계절의 끝과 시작이 어땠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찍어본 점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것을 눈치챌 수 없을 것이다. 내 머리 위에 누군가 점을 찍어둔대도 나도 그것을 알아차릴 수 없듯이 말이다. 하지만 아주 드물게 아주 가끔 어딘가 가는 내가 뚜렷하게 보일 때가 있을 것이고 물론 그러다 말 것이고 아마 그뿐일 것이다. 하지만 잠깐의 그 확실한 보임은 보이는 것으로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것이 무언가를 바꾸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말이다. 

(...) 아무튼 가고 있고 하고 있고 잠깐 볼 수 있던 가는 사람들의 방향과 흐름을 나는 선명하게 기억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난 또 그것을 내 기억으로 나는, 이라고 말하며 언젠가 말하고 있겠지." (<이해없이 당분간>, 내 기억으로 나는, 박솔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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