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짓과 소리
발레를 전공한 친구와 피아노 연주회에 간 적이 있다. 연주가 끝나자마자 음악 감상평을 묻는 내 질문에 그녀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 말은 묵직한 울림을 남겼다.
“무대로 걸어 나오는 모습과 인사하는 태도가 아쉽더라. 왜 허리를 구부정하게 하고 시선을 바닥에만 두는 걸까? 연주자가 무대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이미 연주는 시작된 게 아닐까?”
발레리나인 친구의 시선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무대로 걸어 나오는 연주자를 보며 그들의 소리를 상상하는 습관이 있다. 미소를 머금고 무대로 향하는 사람, 어깨를 숙이고 시선을 바닥에 두며 무겁게 발을 옮기는 사람, 피아노 속으로 빨려들 듯 몸을 깊이 숙이고 연주에 몰두하는 사람, 허리를 곧게 펴고 건반을 다독이듯 연주하는 사람—이처럼 각자의 몸짓 속에서 저마다의 소리와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피아니스트는 단 하나의 음을 위해 온몸을 세심하게 조율한다. 손끝에서 손목, 팔과 다리, 페달을 밟는 발끝에 이르기까지, 모든 움직임이 훈련된 제스처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단 한 음을 연주하기 위해서도 예비 동작이 필요하다. 마치 골프 스윙에서 먼 곳을 겨냥할 때 강렬한 준비 동작이 필요한 것처럼, 부드러운 퍼팅을 위해 힘을 빼야 하는 것처럼.
피아니스트의 손과 팔, 손가락이 만드는 미세한 움직임 또한 하나의 음악을 완성하기 위한 춤이 아닐까? 무대 위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춤을 추며 청중에게 소리를 전달하는 피아니스트는, 결국 또 하나의 무용수가 된다. 연주자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음들은 무용수가 무대 위에서 그리는 선처럼 청중을 몰입과 감동의 순간으로 인도하는 몸짓이다.
피아니스트와 발레리나는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는 예술의 길을 걷지만, 무대 위에서는 어느 순간 닮아간다. 피아니스트는 소리로 춤을 추고, 발레리나는 몸으로 음악을 연주하며, 그들의 무대는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된다. 각자가 자신만의 춤을 선보이는 그 순간, 피아니스트는 무용수가 되고, 발레리나는 연주자가 된다.
연주회장을 나와 조용히 길을 걸으며 우리는 발걸음을 맞춘다. 피아니스트를 꿈꾸던 발레리나인 친구와 발레리나를 꿈꾸던 피아니스트인 내가 나란히 걷는다. 그 순간,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음악에 몸을 맡기니 어릴 적 꿈꾸던 발레리나가 된 듯하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 짓는다.
“다시 태어나면 피아니스트가 될 거야,” 친구가 말하자, 나는 웃으며 답한다.
“나는 발레리나가 될 거야.”
무대도 관객도 없는 고요한 공간에서 우리의 발걸음은 춤이 되고, 피아노의 선율이 되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