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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내음 Jan 11. 2022

굿바이, 어금니

삶의 구멍, 마음의 구멍

텅 비어 있는 자리가 허전하다. 입안 깊숙이 혀를 들이밀고 이가 빠져나간 부분을 살살 건드려 본다. 생각보다 깊고 넓게 파인 구멍이 느껴진다. 32개나 되는 수많은 치아 중 달랑 하나 뺐을 뿐인데 이렇게 입안과 마음에 큰 구멍이 느껴질 줄 몰랐다.      



몇 달을 치통에 시달리다 동네 치과를 찾았다. 조금 썩었겠지 하고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갈수록 치통이 심해지는 것 같았다. 상태가 심각해서 이를 뽑고 그 자리에 임플란트를 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듣는 순간, 여러 가지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이 스치며 지나갔다.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이 굳건할 것 같던 것도 결국 무너지고 변한다는 것,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살았던 생각이 역시 나이는 어쩔 수가 없구나 하는 씁쓸한 생각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좀 더 관리를 잘할걸'     

온갖 후회와 자책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계절은 아직 가을인데 때 이른 눈발이 흩날리며 겨울이 찾아온 듯 몸과 마음이 추웠다. 너무 일찍 찾아온 ’ 임플란트‘라는 불청객을 인정하기 싫어서 몇 달을 진통제를 먹으며 버텼다. 그러나 잠시 주춤하는 듯하던 치통은 갈수록 더욱 심해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늦추지 말고 어서 나를 빼 달라고 어금니는 나에게 지속적으로 텔레파시를 보내고 있었다.      


비장한 마음으로 치과 문을 밀고 들어갔다. 친절한 미소나 인사도 이 순간에는 아무런 위로나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나와 수십 년을 동고동락한 치아의 운명을 감당하는 것은 오로지 나 한 사람뿐이었다. 따끔한 바늘이 내 잇몸을 찌르며 입안에 시리고 차가우면서 묵직한 마취 기운이 퍼질 때 문득 외로움이 밀려왔다. 나만 혼자 다른 세계에 가 있는 듯, 두렵고 외로웠다.


'치아는 오복 중의 하나야',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모습, 욕실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아버지의 틀니를 처음 발견했을 때 느꼈던 낯설고 두려웠던 느낌, 모든 장면들이 귓가에 울리는 날카로운 금속성의 기계 소리와 함께 빠르게 눈앞을 스치며 지나갔다.    

   

‘잘 가 , 그동안 고마웠어’.

내 어금니와의 한 판 힘겨루기는 의사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50여 년의 세월을 같이 보낸 나의 오래된 친구인 어금니와 그렇게 이별했다.

 


    

거울을 들고 입안을 들여다본다. 언젠가는 구멍 속에 잇몸 살이 차오르고 임플란트로 된 새로운 치아가 구멍을 메꾸리라…. 돌이켜보면 미리 조바심내고 걱정한 것은 몸보다 마음이 먼저였다. 시간이 갈수록 하나둘씩 찾아오는 삶의 구멍과 변화들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할 나의 삶의 흔적이 아닐까.  

    

치과 문을 열고 나와 거리로 나섰다. 시달리던 치통이 없으니 날아갈 듯 몸도 마음도 가볍다. '그거 봐 생각보다 괜찮지?' 나를 위로하며 바라본 늦가을의 한 줄기 햇살이 더없이 눈이 부시다.  


보이는 모든 것이 경이롭고 새롭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세월이 흐르는 것도, 나이가 들어가는 것도 그다지 나쁘기만 한 일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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