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울퉁불퉁한 바위 위에서 바람을 맞는다. 에메랄드빛 제주 바다, 버섯처럼 굵은 기둥에 동그란 갓 모양을 한 바위 위에 오르니, 사방으로 펼쳐진 평평한 플로어가 눈앞에 열린다.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아이처럼 사뿐사뿐 스텝을 밟아본다.
글쓰기 반 친구가 J 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시상식이 제주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함께 가서 축하해 줄 사람을 환영한다는 말에 이유 모를 설렘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망설임 없이 이름을 명단에 적고, 마음이 바뀌기 전에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내 마음은 이미 제주 바닷가로 향하고 있었다.
소극적이고 낯을 많이 가리는 내게는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대학 시절 엠티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단체 여행도 한 번 경험해보지 못했으니까.
제주공항에 내리자 맑고 신선한 바람이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한겨울인데도 이곳엔 벌써 봄기운이 완연하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상쾌한 공기가 마스크를 뚫고 스며들며, 코로나로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해 준다.
차를 빌려 첫 번째 목적지로 향했다. 도심에서 멀지 않은 숲 속에 자리한 제주 문학관은 멋진 도서관 같기도, 세련된 북 카페 같기도 했다. 숲 속 공간이 주는 고요함과 아늑함에 매료되어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큰 창으로 보이는 길게 뻗은 나무들의 초록빛 풍경이 여행의 설렘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문학관을 나와 바닷가 근처 식당에서 고등어조림과 물회 덮밥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월정리 해안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여기 경치가 제일 예뻐요.” 제주에서 한 달 살기를 했던 H의 말이 끝나자마자, 운전대를 잡은 S가 능숙하게 차를 돌렸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꼬불꼬불한 해안길을 함께 걸었다. 낙엽이 굴러가는 모습만 봐도 웃음이 터지던 수학여행의 그 시절처럼, 모든 풍경이 새롭고 즐거웠다. 바다 냄새와 바람 냄새를 맡으며 감동했고, 누군가의 한마디에도 웃음이 쏟아졌다.
앞서 걷던 두 친구가 보이지 않아 주위를 둘러보니, 높은 바위 위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그곳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서로 손을 잡아주고, 뒤에서 밀어주며 가파르고 거친 검은 바위를 단숨에 올랐다.
높고 넓은 바위 위에 서니 온통 푸른 바다가 펼쳐지고, 발아래에서는 거친 파도가 하얗게 부서진다. 들숨과 날숨만을 의식하며 너울거리는 파도와 바람의 리듬에 몸을 맡긴다. 청량한 바닷바람이 폐 깊숙이 스며들어, 몸과 마음이 날아갈 듯 가벼워진다. 갑자기 누군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평평한 플로어가 사방으로 펼쳐진다. 분위기 탓일까. 아이처럼 사뿐사뿐 스텝을 밟아본다. 파도는 갯바위 다리에 매달려 보채다 사정없이 때리고 도망친다.
해안을 따라 휘도는 산책길은 세찬 바람에 밀렸다가 되돌아오며 구불거리고, 가까이에서 들리는 파도 소리가 귓바퀴에 쟁쟁하다. 투명한 햇살 아래, 수십 가지 빛깔로 변하는 바다는 요술쟁이다.
파도가 되지 못한 바위와 바위가 되지 못한 파도가 팽팽히 서로를 잡아당기며 지칠 줄 모르는 마찰음을 낸다. 현실과 꿈이 뒤섞이는 시간, 노랫소리는 한 옥타브씩 높아지고 나는 춤추다 멈추기를 반복한다.
내 두 발은 이성의 바위와 관능의 파도를 넘나들며 현실 너머 꿈의 세계로 미끄러진다. 춤추다 멈추는 순간, 바람도 파도도 시간도 그 자리에 멈춘 듯했다. 다시 바람이 불고, 노랫소리와 춤이 이어졌다.
“여행이 좋았나 봐요.”
프로필 사진 속 바다 위의 춤을 본 사람마다 한 마디씩 건넨다. 한 장의 정지된 사진인데도, 그 안에서 바람과 춤, 움직임과 멈춤이 느껴진다는 것이 신기하다.
울퉁불퉁한 검은 바위 위에서 바람을 맞으며 춤추던 그 순간이, 마치 영화 속 한 장의 스틸컷처럼 내 마음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춤추는 파도와 단단한 바위가 어우러진 풍경은 참 아름다웠다. 바람을 맞으며 바위 위에 서 있던 그 순간, 나는 자연의 리듬에 스며들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인생의 무대에서도, 나는 오늘도 자연이 가르쳐준 그 리듬에 몸을 맡기고 아름다운 춤을 추길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