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티슬라바에서의 하루
비엔나 여행의 마지막 날, 나는 특별한 계획 없이 느긋하게 아침을 먹으며 어디를 갈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엊그제 시내 투어에서 만난 사람이 추천했던 P 아웃렛이 떠올랐다. 다른 유럽 도시들보다 훨씬 볼거리가 많으니 꼭 가보라고 했다.
아이쇼핑이나 하며 하루를 가볍게 보내기로 마음먹은 나는 구글 지도를 열어 P 아웃렛을 검색했다. 예상보다 거리가 멀었고, 가는 방법도 복잡했다. 호텔 프런트 데스크의 여직원에게 다시 가는 길을 물어보았다. 감사 인사를 하고 떠나려는 순간, 그녀가 나를 불렀다.
“혹시 브라티슬라바 가본 적 있어요?”
“네? 브라티슬라바요? 그게 뭐죠?”
낯선 이름에 당황한 내가 되묻자, 그녀는 메모지에 브라티슬라바의 이름을 적으며 설명해 주었다.
“‘Bratislava’, 여기서 기차로 한 시간 정도면 갈 수 있어요. 한 시간만 가면 다른 나라에 닿는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나요? 사람들이 잘 모르는 숨은 보석 같은 아름다운 곳이에요.”
브라티슬라바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던 나는 그녀의 말에 흥미가 생겼다. 슬로바키아의 수도라는 사실과, 체코슬로바키아가 분리되어 독립한 국가라는 점을 검색하며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정보는 전혀 없었다.
미지의 나라, 미지의 도시에 대한 호기심이 솟구쳤던 걸까? 어느새 나는 아웃렛 대신 브라티슬라바를 향해 가는 기차역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기차로 약 한 시간이 지나 브라티슬라바 중앙역에 도착했다. 첫인상은 한국의 시골처럼 정겹고 소박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검색을 통해 구시가지가 한눈에 보인다는 브라티슬라바성으로 향하기로 했다.
계절은 초가을이었지만, 성으로 오르는 길은 여전히 한여름의 불볕더위처럼 뜨거웠다. 나는 카디건을 벗어 민소매 차림으로 언덕을 천천히 올랐다. 어느덧 브라티슬라바성이 눈앞에 나타났다.
아름다운 구시가지의 풍경과 푸르고 청명한 도나우강이 흑해로 흘러가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벽에 기대어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서 있었다. 몸과 마음이 평온해지고 고요해지는 순간이었다.
성을 내려와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돌길로 된 좁은 골목길을 따라 가자, 오래된 역사가 물씬 느껴지는 구시가지의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건물들은 고풍스럽고, 곳곳에 서 있는 동상들과 성당들, 아기자기한 기념품 가게들이 어우러져, 마치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진 역사 속으로 들어간 듯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시청 앞 광장에 있는 노천카페에 앉아 와인 한 잔과 슬로바키아 전통 요리를 주문했다. 난생처음 혼자 떠난 여행의 신비로운 맛이 더해져서인지 음식은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했다. 낯선 곳에 혼자 있다는 사실이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며 골목길의 하얀 건물들이 살포시 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군데군데 식당과 카페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며 거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삼삼오오 앉아 이야기 꽃을 피우는 사람들로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붉은빛을 자랑하던 노을이 사그라들고 어둠이 찾아온다. 일몰의 순간은 언제나 숙연하다. 마치 인생을 열심히 살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사람처럼 거룩하고 아름다웠다. 조용히 나를 돌아보며,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깊이 성찰하는 시간이다.
너무 늦지 않게 길 떠날 차비를 한다. 점점 어둠이 짙어지는 좁다란 골목길을 이리저리 흔들리며 걷는다. 길을 잃어도 두렵지 않다. 새롭게 펼쳐지는 풍경에 몸을 맡기고 느릿느릿 걸어가다 보니 저 멀리 기차역이 보인다.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던, 뭔가에 고요히 몰두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브라티슬라바는 나에게 그런 힘을 건네주었던 도시다.
브라티슬라바역의 플랫폼에 비엔나행 기차가 꿈결처럼 들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