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떠보니 '청송'
때로는 길은 가면서 만들어진다. 계획 없이 떠난 여행에서 뜻밖의 보석 같은 곳을 발견하기도 한다. 수채화처럼 맑은 날들이 연일 이어지던 연휴의 끝자락, 어디든 가보자는 마음으로 가볍게 가방을 챙겼다. 안동을 가보기로 했다. 늘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차에 올라타고 나서야 머물 숙소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별동산 달빛 아래’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평범하지 않은 이름에 호기심이 생겼을까. 잠시 머물러 보자는 가벼운 충동에 나는 어느새 뜻밖의 도시 ‘청송’으로 향하고 있었다. 뭔가 색다른 경험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사실 ‘청송’이라는 도시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청송사과, 청송교도소, 그리고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본관이 ‘청송 심 씨’였다는 것 정도밖에…
한적한 길을 두 시간 달려 도착한 청송,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산소 카페 ’라는 문구였다. 산과 숲, 자연이 주는 청명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낮은 돌담과 기와집, 큰 버드나무와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정감 있는 마을의 풍경이 펼쳐진다.
오래된 고향 집을 조금 손봐 새로 꾸몄다는 아담한 숙소는 알록달록한 침구와 검정, 흰 고무신이 정겨운 옛 분위기를 불러일으켰다. 사장님 내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앞산 너머 하늘을 보니 어느새 주홍빛 노을이 살포시 내려앉기 시작했다.
시골의 밤은 일찍 찾아왔다. TV도 없는 작은 방에는 세월 속에 깊이 배어든 은은한 향기가 가득하고, 고요한 밤의 풍경 소리가 들려왔다. 가로등 불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 벌레 우는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얇은 요 위에 몸을 누였다.
창호지 너머로 들리는 빗소리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방문을 열자 밤새 내린 비로 세상이 투명하게 반짝였다. 우산을 들고 마을 앞길로 산책을 나섰다. 어디선가 장작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낮은 돌담 너머 마을 집 뜰에는 아기자기한 꽃들이 피어 있고, 사과나무에는 붉은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조금 더 걸어가니 백여 년 역사를 자랑하는 99칸의 집, ‘송소 고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깊은 산골 마을에 이렇게 큰 집이 지어졌다는 것이 신기했다. 청송 심 씨 집안이 조선시대 최고의 재력가였던 덕에 13년 동안 지어졌다고 한다. 오랜 역사를 품은 이 집의 마루에 앉으니, 과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감동이 밀려왔다.
숙소로 돌아오니 사장님 내외가 직접 재배한 꽃차와 손수 만든 요구르트, 고구마와 감자로 정성스럽게 차려진 아침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 차려준 아침을 먹은 것이 언제였던가. 백 년 된 수양버들이 보이는 비 오는 정원에서의 아침은 어느 유명 호텔의 조식보다 더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아침 일찍 짐을 챙긴다. 원래 목적지였던 안동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이번에는 마음 가는 대로 떠나보기로 했다. 작정하고 떠난 무계획의 여행. 그 앞에 또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기대된다. 새롭게 만나는 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