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 Chopin; Etude, Op.25 No.11
계절도, 시간도 한 해의 끄트머리, 겨울밤이었다. 어느 작은 무대에서 피아노 연주 제안을 받고 ‘무슨 곡을 준비할까’ 고민하던 중, 한 멜로디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 곡은 내게 아픈 상처로 남아 있어 마음속 깊이 숨겨두었던 곡이었다. 무슨 조화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이 곡을 이미 마음속으로 정하고 있었다.
악보도 펼치지 않은 채 ‘겨울바람’ (F. Chopin; Etude, Op.25 No.11)’을 조심스레 쳐 본다. 두 손이 미끄러지듯 건반 위를 오간다.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그 곡을 손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내 손끝을 타고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민 ‘겨울바람’은 점점 빠르게 건반 위를 달리며, 꽁꽁 싸매어 놓았던 아픈 기억을 하나씩 불러온다.
대학 입학시험을 준비하던 고3 때의 일이었다. 왠지 자신감이 없고 불안했다. 연습 때 완벽하게 쳐도 막상 실전에서 더 긴장하기 마련인데, 입시를 며칠 앞둔 마지막 레슨에서조차 실수가 잦았다.
“시험 때는 실수하지 말고 차분하게 쳐!”
선생님의 무심한 한마디가 이루지 못할 꿈처럼 멀게 느껴졌다.
이틀 동안 진행되는 대학 입학 실기시험이 시작되었다. 첫날,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시험장에 갔다. S대학교 강당 무대에는 세 대의 업라이트 피아노가 놓여 있었고, 시험 직전에 잠깐의 연습 시간이 주어졌다. 수험생들은 무대로 올라가 천천히 곡을 연습했고, 손이 풀리면 차례로 시험장에 들어갔다. 시험장에 들어서자 흰 천으로 가려진 막 뒤에 몇 명의 심사위원이 앉아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이 몇 명인지, 누구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막 뒤의 어렴풋한 그림자와 작은 숨소리, 헛기침 소리가 나를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지정곡은 쇼팽의 전주곡 8번과 16번이었다. 첫 코드를 칠 때 긴장한 탓에 가장 중요한 윗소리를 놓쳤다.
‘시작이 안 좋네...’
손에 땀이 났다. 빠른 부분에서 손에 힘이 들어갔고, 의지와 상관없이 곡이 더 빨라졌다. 결국 오른손과 왼손이 곡예하듯 아슬아슬하게 엇나갔다.
‘차분하게,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순간, "땡" 하고 종이 울렸다. 나를 비웃듯 크고 야멸찬 소리였다. 몇 개월을 준비한 곡이 단 1분 30초 만에 평가되었다. 누가 더 빠르고 정확하게 치는지 겨루는 냉혹한 싸움이었다.
힘없이 고개 떨구고 건물 밖으로 나오는 나를 엄마와 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맞아주었다. 건물 벽에 귀를 대고 얼마나 오래 기다리고 있었는지 추위에 얼은 뺨이 사과같이 빨갛게 보였다.
“왜 그래? 실수했니?”
“….”
“말 좀 해봐.”
"망했어. 말하기도 싫어."
나는 화풀이하듯 그들을 뒤로한 채 앞서 걸어갔다.
둘째 날 시험 곡은 쇼팽의 연습곡 Op.25 No.11, '겨울바람'이었다. 쇼팽의 연습곡 중에서도 가장 길고 어렵다는 평가를 받는 곡이다.
초조하게 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남학생이 성큼성큼 무대에 올라가 손도 풀지 않은 채 '겨울바람'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연주했다. 그의 연주는 자신감으로 가득했고,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주위는 조용해졌고, 사람들은 그의 연주에 집중했다. 다음 순서인 나는 더욱 주눅이 들었다.
"000번!"
내 수험번호가 불렸다. 순간, 피아노가 검은 괴물로 변한 듯 보였다. 시험장으로 향하는 10미터 남짓한 거리가 너무 멀게 느껴졌다. 마음속에서 은밀한 갈등이 일어났다.
'어제도 망쳤는데, 오늘은 더 자신 없는 곡이야. 그냥 시험을 포기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
그 순간, 아까 그 남학생과 마주쳤다. 그의 더 당당해진 눈빛이 나를 스쳐갔다. 나는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종종걸음으로 출구를 향했다.
"학생! 이쪽이에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내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추운 시절이었다. 겨울바람에 온몸이 움츠러들어, 나는 작은 공벌레처럼 코트 속에 몸을 말아 넣고 다녔다. 엄마에게 말할 용기가 없어서 매일을 살얼음판 위에서 걷듯 지냈다.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비밀은, 선생님의 전화 한 통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00 이가 시험을 안 봤다던 데 무슨 일입니까?”
“네? 시험을 안 보다니요?”
엄마는 한동안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망을 넘어 충격을 받은 듯했다. 나는 그저 엄마의 화난 등만 바라보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다시 입시를 준비하면서, 걱정하는 가족과 달리 나는 여유롭고 충만한 날들을 보냈다. 학원을 나서며 본 해 질 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한참 동안 넋을 잃고 거리에서 서 있기도 했다. 두 번째 입학시험은 준비한 만큼 차분하게 치렀고,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시험장을 나왔다.
‘겨울바람’은 여전히 내게 아픈 상처로 남아 있었다. 느리고 조용한 네 마디의 서주는 늘 나를 두렵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어 몰아치는 빠른 알레그로는 광풍처럼 느껴졌고, 나는 그 패시지가 두려웠다.
실수하지 않을까, 남보다 느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음악과 삶은 현재에 있어야 하지만, 이 곡은 내게 늘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이제 ‘겨울바람’을 세상 밖으로 내보낼 때다. 깊게 숨을 내쉬며 건반을 누른다. 느리고 조용한 서주는 한 음 한 음 부드럽게 나를 이끈다. 이어지는 격정적인 주제는 왼손의 멜로디와 대화하며, 나를 겨울바람 속으로, 때로는 햇살 아래로 데려간다.
내가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가 나를 이끄는 듯하다. 상승하는 4옥타브의 음계가 곡의 마지막을 향해 치닫는다. fff의 마지막 스타카토가 울리며,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상처와 기억의 매듭이 풀린다. 음표들은 겨울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간다.
연주가 끝났다.
내가 깨닫지 못했을 뿐, 세상 모든 것에 아름다움이 숨어 있다.
하얀 건반 위에 내가 쓴 문장들이 놓이고
내 추억은 반올림되어 검은건반 속에서 더 당당해진다.
다시, 겨울바람이 불어온다. 나는 멈추지 않고 그 속으로 당당하게 걸어갈 것이다.
Photo by Park, Min S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