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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내음 Apr 29. 2021

베르테르와 슈만의 세레나데"

사랑, 그 아름다운 이름

  습관처럼 피아노 앞에 앉았다. 창 너머로 노을이 붉게 물들었다. 나는 잠시 주홍빛 풍경을 바라보았다가 악보를 펼쳤다. 슈만의 피아노곡, 환상 소품집 중 첫 곡 '저녁에(Des Abends)'의 앞머리에 쓰인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친밀한 감정으로(Sehr innig zu spielen)‘     


나는 깊숙이 들이마셨던 숨을 첫 음과 함께 내쉬었다. 부드럽고 몽환적인 음표들이 공기 중에 퍼지며 머릿속에 아득한 장면들이 떠올랐다. 얼마 전 읽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속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였다.


사랑이 없다면 세상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설령 짧은 순간의 환영에 불과할지라도 어린 소년들같이 그 기이한 모습에 황홀해한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한 걸세.
      

 베르테르는 마을 무도회에서 로테를 본 순간 사랑에 빠졌고, 그의 세계는 오직 그녀로 가득 찼다. 밤과 낮의 경계도 사라지고, 해와 별들도 그의 시야에서 사라진 듯했다. 오직 그녀의 모습과 음성만이 그의 세계를 채웠다. 로테에 대한 베르테르의 사랑은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한 후에도 식을 줄 모르고 점점 불타올랐다. 그의 마음속에 따뜻하게 차올랐던 행복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번민과 갈등으로 이제 괴로움으로 변해갔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로테를 ’ 내 영혼의 여인‘‘이라 부르는 베르테르와 연인이던 클라라를 ‘나의 영혼‘이라 칭하며 음악 속에서 사랑과 이별의 고통을 노래한 슈만의 모습이 음악 속에서 겹쳐졌다.  음표 하나하나가 두 사람의 운명을 교차시키며, 서로 다른 시대의 두 사랑이 음악 속에서 만나는 듯했다


 

  법률을 전공하다 음악으로 진로를 바꾼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은 유명한 피아노 선생이었던 비크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의 딸 클라라를 만나면서, 그들의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슈만과 클라라의 사랑은 단순한 연애를 넘어, 서로의 재능을 존중하며 예술적 영감을 주고받는 특별한 음악적 동반자 관계였다. 이들의 이야기는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깊은 감동을 전하며, 음악사에 아름답게 남아 있다.


비크의 반대로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던 슈만에게 그의 가슴속에 차오르는 사랑과 고통의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음악뿐이었다.

 

저는 세상의 모든 일에서 영감을 얻습니다. 제가 느끼는 모든 것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독일 라이프치히에 있는 슈만과 클라라가 살던 집


<환상 소품집, Op.12>은 슈만이 클라라와의 이별로 아픔을 겪던 27세에 쓴 작품이다. ‘저녁에’, ‘비상’, ‘왜?’, ‘변덕’, ‘밤에’, ‘우화’, ‘얽힌 꿈’, ‘노래의 끝’ 등 각 곡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서 비롯된 슬픔을 베르테르의 편지처럼 내밀하게 고백한다. 몽환적인 회상부터 격정적인 사랑의 감정까지, 다양한 선율이 끊임없이 사랑을 고백한다.


슈만은 이 곡들에서 몽롱하게 추억을 회상하는 순간과 격렬하게 폭발하는 사랑의 욕망을 넘나들며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을 음악으로 풀어낸다.


첫 곡 *저녁에(Des Abends)*의 몽환적인 멜로디는 자연스레 눈을 감게 한다. 높은 음역을 연주하는 오른손과 낮은 음역의 왼손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가, 중간에 교차하며 부드럽게 만나 사랑을 속삭이는 듯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비상(Aufschwung)*은 도약하는 선율과 휘몰아치는 빠른 리듬을 통해 격정적인 사랑의 감정을 강렬하게 표출하며, 그 열정은 *밤에(In der Nacht)*에서 절정에 이른다.


활기 있고 힘차게 날아오르던 음들이 마지막 곡의 코다에서 갑자기 침울하게 가라앉으며 조용하게 끝을 맺는다. 어쩌면, 슬프게 마감할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던 것은 아닐까.     




해가 지고 있다. 베르테르와 슈만, 그들이 남긴 사랑의 편지와 멜로디가 두 번째 25세의 나이를 훌쩍 넘어선 나를 환상의 세계로 데려간다. 세기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사랑에 대한 환상과 꿈일 것이다.


문장과 음표들이 서로 얽히며, 글 속에서 음악 속에서 나는 베르테르가 되고, 로테가 되고, 슈만과 클라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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