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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페달링

음을 잇다

“나를 친구라고 생각은 하니?”

오래된 친구가 툭, 한마디를 던졌다. 웃으며 말했지만, 그 말이 닿는 순간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나는 짐짓 놀란 얼굴로 친구를 바라봤다.

“응? 무슨 말이야?”

“나, 문자 하나 보내기까지도 한참을 망설여. 힘들고 외로울 때… 내 마음, 한 번쯤 들여다본 적 있어?”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엔 눌러둔 진심이 조용히 묻어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친구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돌아보면, 나는 한 번도 먼저 그녀에게 연락한 적이 없었다. 묻기보단 기다렸고, 손을 내밀기보단 다가와 주길 바랐다. 늘 곁에 있어 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내 마음도 알아주길 기대했다. 언제부턴가 그녀의 연락이 뜸해졌고, 나누는 대화도 줄어들었다. 친한 친구에서 그냥저냥 친구로, 친구라기보다는 그저 잘 아는 지인으로, 우리는 서로를 조금씩 놓아버렸다. 뒤늦게야 깨달았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친구와 연결된 페달에서 발을 떼고 있었다는 것을.



오랜 세월이 지나도 흐려지지 않고, 오히려 선명해지는 기억이 있다. 드뷔시의 피아노곡을 배우던 날이었다. 연습해 온 곡을 다 치고 나자, 지도교수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피아니스트의 발은, 발레리나 같아야 해.”

무슨 뜻인지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대답 대신 피아노 앞으로 가 앉았다. 내 시선은 건반에서 그의 발끝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은은하게 빛나는 세 개의 황동 페달이 바닥 위에 놓여 있었고, 넓적한 갈색 구두를 신은 그의 발끝이 마치 공기를 쓰다듬듯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손이 건반 위를 유영하고, 그 흐름을 따라 발끝도 부드럽게 춤을 추었다. 한 페달에서 다른 페달로, 때로는 두세 개를 동시에 눌렀다 떼며, 소리는 미끄러지듯 흘러갔다. 그 움직임은 섬세하고 우아했다. 마치 무대 위에서 춤추는 발레리나처럼 아름다웠다.

같은 곡이었다. 내가 수없이 연습했던, 익숙하다고 여겼던 그 선율. 하지만 그의 발끝이 닿는 순간, 음악은 전혀 다른 결을 품었다. 눌림과 떼어냄 사이, 페달은 소리의 경계를 허물고 음과 음을 부드럽게 이어주었다. 짧게 밟으면 맑은 물방울처럼 또렷하고, 길게 누르면 잔잔한 호수처럼 퍼졌다 나는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수십 년을 피아노와 함께했지만, 페달을 밟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어린 시절엔 악보에 적힌 기호나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일 뿐이었다. 소리를 들으려 하기보다, 정해진 타이밍에 발을 맞추는 것이 전부였다. 오른쪽 페달은 음과 음을 부드럽게 잇고 긴 여운을 남긴다. 가운데 페달은 특정 음이나 화성을 공간 속에 머물게 하고, 왼쪽 페달은 소리를 낮추어 은밀한 감정을 흘려보낸다. 오래 밟으면 울림이 탁해지고, 너무 자주 바꾸면 음악은 메마른다. 길고 깊게 누를지, 짧고 가볍게 밟을지. 귀로 들으며, 발끝으로 끊임없이 조율해야 한다. 시간이 지나며 깨닫는다. 같은 음이라도 어떤 페달을, 어떻게 밟느냐에 따라 숨결이 달라진다는 것을.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페달이 있다. 나는 지금, 누군가와 연결된 페달을 밟고 있을까. 그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은 채 무심히 밟고 있진 않을까.

함께하고 싶은 누군가에게서, 너무 오래 발을 떼고 있었던 건 아닐까.


친구와 연락이 끊긴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수없이 눌렀다 지웠다. 결국 단 한 마디도 건네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갔다. 나는 피아노 앞에 앉아 조심스레 페달 위에 발을 얹는다. 발레리나처럼 춤추던 선생님의 발이 떠오른다. 그 가르침은 지금, 내 안에서 오래 잠들어 있던 마음의 음 하나를 조용히 깨운다. 그가 알려준 건 단순한 페달의 사용법이 아니라, 멈춘 음과 음 사이를 잇는 용기였다.


나는 아무 일도 없던 척, 용기를 내어 친구에게 말을 건넨다.

“그동안 잘 지냈어?”

전송 버튼을 누르는 손끝이 살짝 떨린다. 침묵 속에 묻어두었던 감정이 잔잔한 물결처럼 퍼져간다. 마치 멈춰 있던 음 하나가 다시 깨어나는 듯하다. 잠시 뒤, 화면에 그녀의 답장이 뜬다.

“오랜만이야. 나도 네 소식 궁금했어.”


그 짧은 한마디가, 멈춰 있던 내 마음속 선율을 다시 울린다. 오래 끊어져 있던 마음과 마음 사이에 조심스럽게 음이 이어지고, 그 음은 선율이 되고, 선율은 조용한 노래가 되어 스며든다. 마치 페달을 밟은 뒤에 남는 여운처럼, 우리 사이의 침묵도 다시 음악이 되어 천천히 흐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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