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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내음 Oct 13. 2022

건반 소리, 마음의 소리

피아노 선생님을 기억하다

몇 년 전, 77세 생일을 맞은 피아노 선생님과 같은 무대에서 공연할 기회가 있었다. 마지막 순서인 선생님의 독주를 무대 뒤에서 듣는데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엄마와 함께 찾아간 첫 레슨부터 지금까지의 음악과 함께 한 세월의 기쁘고 때때로 힘들었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피아노 선생님은 늘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다. 처음 피아노를 배운 선생님은 부리부리한 눈매에 큰 몸집,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호랑이 선생님이라는 별명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여자 선생님이었다. 내가 살던 동네의 꼬마들은 거의 그 선생님한테 처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 선생님은 연습을 제대로 안 했거나 바르지 못한 손 모양으로 피아노를 칠 때, 철썩 소리가 날 정도로 손등을 내려치곤 했다. 피아노 치는 것이 공포의 순간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같이 피아노를 배우러 다녔던 언니는 적성이 맞지 않는다고 그만두었고, 어리광을 잘 피웠던 동생은 피아노가 싫다고 매일 울면서 가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여러 가지로 어중간한 위치의 둘째 딸인 나는 그만두겠다는 말을 할 용기가 없었는지, 어쩌다 계속 피아노를 치고 전공까지 하게 되었다.

 

내 10대, 20대의 젊은 시절을 함께 했던 선생님은 자그마한 얼굴, 자그마한 키의 단아한 인상에 끝이 살짝 올라온 뿔테 안경을 쓴 모습이 매우 지적으로 보였던 여자 선생님이었다. 독일에서 유학을 끝내고 막 귀국했던 그분을 엄마의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 추천으로 만나게 되었다.      


주소를 들고 처음 찾아간 선생님 댁은 서울 변두리에 있는 조그만 철 대문이 있는 아담한 개인 주택이었다. 작은 거실은 소박한 가구와 낡은 피아노 책들로  가득했다. 피아노 앞으로 오게 하더니, 피아노를 쳐보라는 대신 나에게 눈을 감으라고 했다. 선생님이 누르는 음을 무슨 음인지 맞추는 청음 실력테스트였다.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가볍게 청음 테스트를 통과했다. 그다음은 테크닉 테스트였다. 몇 가지의 음계 등을 쳐보라고 시키고는 공부해 올 곡과 레슨 시간을 정해주었다.


세월이 지날수록 선생님은 소극적인 나를 적극적으로 콩쿠르에 참여하도록 했다. 대학교 2학년 때였다. 선생님한테 단단히 미움을 받는 사건이 생겼다. 콩쿠르에 나가기로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콩쿠르 당일에 선생님께 말도 하지 않고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단순하게 준비가 덜 되었으니 나가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큰 오산이었다. 화가 많이 난 선생님은 한동안 나에게 싸늘하고 화난 모습만 보여주었다.


"너한테는 앞으로 콩쿠르 이야기는 다시 안 할 거야!"


2년 동안 선생님의 서늘하고 날카로운 시선을 묵묵히 견뎌야 했다. 좌절했지만 뚜벅뚜벅 내 할 일을 열심히 했다.  다행히 졸업을 앞둔 4학년에 선생님이 다시 콩쿠르 이야기를 꺼냈고,  참가해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기뻐하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며 선생님과 의 화해가 늦게나마 이루어진 것 같아서 좋았다.  

      

나의 마지막 선생님은 유학 시절 배웠던, 유명한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였다. 뛰어난 연주력뿐만 아니라  늘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스튜디오에서 연습하는 성실함과 따뜻하고 겸손한 그의 성품은 더욱 그를 존경하게 만들었다.  날카로운 눈매 뒤에 감춰진 수줍은 표정과 해맑은 미소는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순수하게 만들었다.  

    

두 대의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아 배우던 레슨 시간은 선생님과의 아름다운 소통이고 친밀한 대화였다.  


”이 부분에서는 어떤 감정을 표현하고 싶니? 어느 소절까지 한 호흡으로 노래를 해야 할까? “


늘 질문하고 대답하면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게 했고 표현을 하는 것에 확신을 갖도록 도와주었다. 늘 기계적으로 곡을 연습하던 것에 익숙하던 내게, 선생님은 처음으로 소리를 듣는 것, 호흡하고 노래하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졸업을 앞둔 마지막 레슨에서 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너의 가장 좋은 선생님은 누구인지 아니? “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조금씩 음악을 내 삶 속으로 품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답은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가게 되었다. 그가 내게 전달하려고 한 것은 건반의 소리가 아니고 건반을 통해서 들려오는 내 안의 소리였다. 모슨 슬픔, 기쁨, 좌절, 그리움이 배어 있는 내 마음의 소리이고 내 삶이 스민 소리였다.     



       

모든 것이 느림보였던 나는 세월이 흘러서도 끊임없이 배운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이 삶의 순간들을 검고 하얀 피아노와 노트북 공간에 채워가며 오늘도 멋진 하루를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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