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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tto Apr 03. 2022

2편-결혼생활의 득(得)

다음 날 아침, 

여전히 우리는 서로를 유령 취급하는 동시에 온 몸으로 화를 뿜어내고 있었다.

간밤에도 큰 소리 한번 내지 않았지만 침묵으로도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결혼생활을 통해 가장 갈고닦은 실력이랄까. 

지난 몇 년간 하고많은 중요한 것 중에서도 가장 연마된 하찮으면서도 필수 불가결한 스킬이다.


이런 상황이 되면 싸움의 승패를 떠나 가장 큰 피해자는 너도 나도 아닌 홀로 남겨진 아이가 된다.

가능한 아이에게 미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나름 터득한 스킬인데 일단 말을 하지 않고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으며 시간을 끌다가 아이를 유치원에 들여보냄과 동시에 서로를 향해 준비한 온갖 종류의 비난과 증오를 봇물처럼 터뜨리는 것이다. 


어른들의 싸움 사이에 아이가 껴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양면성을 가지는데,

아이 때문에 적시에 원하는 만큼 싸움을 할 수 없어 화가 쌓인다는 단점과

아이 덕분에 조기에 싸움을 끝내버리고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장점이 공존한다.

단점과 장점을 저울에 놓았을 때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는지는 철저히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다.


결혼 후 쭉 DINK(Dounle Income No Kids)를 유지하고 있는 나의 오랜 친구는 

어느 날 부부싸움을 크게 한 뒤 내게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랑이 식었는데 애들 때문에 살아야 하면 너무 불행할 것 같아... 역으로 그래서 우리는 더 헤어질 확률이 높은 거지..."


결국 아이의 유무와 상관없이 결혼생활의 성패는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을 것 같다고 스스로 결론지었다. 


그렇게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우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아이를 무사히 유치원에 들여보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한 차를 탔다. 우습게도 오늘 아침에는 아이를 유치원에 보낸 직후 등산을 할 계획이었다. 일주일에 적어도 두세 번은 올라가는 집 뒤의 작은 동산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여가라기보다는 생존에 가깝기 때문에 가능한 지켜내려고 하는 루틴이다. 싸움의 가장 큰 폐해는 루틴이 깨진다는 것에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어떤 일이 있어도 루틴을 깨는 것을 극도로 금기시하고 있는 나는 어젯밤 부부싸움을 했다는 사실 보다도 그로 인해 오늘 내가 계획한 일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남편을 향한 부정적인 감정 따위를 곱씹으며 시간을 낭비하느니 혼자라도 계획한 일을 마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에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나 홀로 산타기'에 돌입하기로 마음먹었다.


재빨리 운전대를 낚아채어 집이 아닌 산으로 향했다.

당연히 등산은 물 건너갔으니 집으로 가는 줄로 알았다가 졸지에 끌려온 남편은 여전히 화가 날대로 나있었다. 그럴수록 심통이 더 차오르는 나는 평소보다 더 터프하게 주차를 하고 홀더에 꽂혀있는 물병을 훔치듯 챙겨 산 입구로 달아났다. 이 인간이 목이 타 죽는지 마는지 상관도 없다는 듯. 

비로소 우리는 긴긴 시간 함께일 수밖에 없었던 한 공간에서 해방되었고 그때부터 적어도 나는 그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아니 정확히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해가 쨍쨍한 오전이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등산객은 넘쳐났지만 혼자 타는 산은 낯설고 무서웠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하루를 망쳤다는 원망이 생겨버릴 것 같으니 차라리 분노를 동력 삼아 꿋꿋이 올라가는 편이 나았다. 나를 제외한 모든 등산객은 평화로워 보였고 내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기는 죄 없는 울창한 숲이 대신 마셔주고 있었다. 


힘겹게 정상에 도착했을 무렵, 야생 원숭이 떼가 나타났다. 거짓말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내가 사는 이곳 싱가포르에서는 도심 한가운데를 제외하고는 원숭이 떼가 길거리에 종종 출몰하곤 한다. 그러니 산 정상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나는 원숭이 떼를 극도로 무서워한다. 어째서 평소에는 한 번도 나타나지도 않던 녀석들이 하필 오늘, 홀로인 날, 원숭이네 삼대는 단체로 마실을 나와 내 앞길을 가로막는 것일까. 

'아쒸. 어쩌지...? 머피의 법칙인가.'


본능적으로 옆을 지나가던 낯선 아저씨 옆에 바짝 붙어버렸다.

혹시라도 원숭이가 공격하면 옆 아저씨를 방패 삼아 쳐낼 계획이었다.

야심 찬 계획을 세우는 순간, 또다시 화가 치밀었다.

'아니 이 인간은 대체 산을 탄 거야 만 거야? 어디 있는 거야? 정말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두려움을 등에 업은 채 중얼거리며 무사히 낯선 아저씨 등 뒤에 숨어 원숭이 가족을 피해 돌아 나왔다. 


정상 반환점을 돌아 터덜터덜 내리막을 내려오고 있었다.

안 그래도 경사가 급한데 비 온 뒤라 나뭇잎까지 젖어있으니 자칫하면 미끄러지기 십상이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힘이 풀린 다리를 천천히 한 걸음씩 옮기며 내려갔다. 시계를 보니 한 시간이 경과해있었다. 


'내가 이 산을 왜 올라왔을까. 내려갈 일이 까마득하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놈의 루틴 따위가 뭐라고, 그냥 실컷 싸울걸. 근데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무슨 일 생겼나? 왜 불안하지... 찾으러 가봐야겠어!' 

라고 생각하는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


"여보~~~~~~~~! 같이 가 여보~~~~~~!"


저 멀리 뒤에서 후다닥 바삐 뛰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뭐야? 산을 탄 거야? 뒤에 따라오고 있었어? 다 보고 있었던 거야?'

기가 막혀 뒤를 돌아보니 남편이가 순식간에 내리막을 뛰어내려와 덥석! 내 팔짱을 끼며 씩~ 웃는다.

"위험해 여보~ 어서 내 팔을 잡아." 

억지로 내 팔을 빼어 자기 팔에 끼워본다.


"와, 타이밍 봐라. 1분만 늦었어도 팔짱 안 꼈을 텐데!"

못 이기는 척 팔짱을 껴주었다.

사실, 1분 늦었으면 내가 먼저 팔짱을 꼈을 것이다. 다행이다.

그리고 나는 애써 의연한 척 호기롭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늦지 않기, 어떤 일이 있어도 루틴을 깨지 말기. 알았지? 우리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야 명심해줘."

남편은 어쩐 일인지 고분고분 알았다고 했다.

실은, 나 스스로를 향한 다짐이었다.


나란히 손을 잡고 남은 산자락을 내려왔다.

콧노래도 흥얼거렸다.


'너의 그 한마디 말도 그 웃음도 나에겐 커다란 의미' <산울림- 너의 의미->


옆을 올려다보니 문득 나와 너무도 닮아있는 그가 보였다.

마치 거울을 보는 듯.

부끄러움도 추함도 관용도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 있어 오늘도 어쩔 수 없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겨우, 간신히 새끼 손가락 한마디 정도만큼 더 깊어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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