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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콜과 구공탄 May 11. 2023

보통은 잘 할 때 재밌다 그런데...

사람, 직업, 그리고 소통 

 새로운 직업을 찾아 일을 시작한지 오늘로 6일째. 이 회사는 격주로 보수를 지급한다. 보통 이 나라는 주급 또는 격주로 페이를 준다. 물론, 월급도 있긴 하지만, 이 나라에서 일하면서 딱 한 군데에서 월급을 받아봤다. 그러면, 나의 새로운 직업은 무엇일까? 내 가족 말고는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을 나의 새로운 직업에 대해 굳이 여기서 썰을 물어보아야 할 이유를 오늘 일하면서 발견했다. 그래서, 쓴다.


 Painter


 그래, 나는 지난 주부터 페인터 일을 시작했다. 영주권을 따고 풀타임으로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고민고민 끝에 결정한 일이다. 웬 고민? 3년 전이었던가? 핸디맨이라는 분과 함께 일을 한 적이 있다. 핸디맨은 한국식으로 풀어 말하자면, 철물점 사장님이 별도의 가게 없이 연락 오는 집집마다 방문해서 오만가지 일을 다 해주는 사람이다. 너무 어려웠나? 그냥 '돈 받는 맥가이버'라고 하자. 내가 함께 한 그 맥가이버는 페인트, 전기, 배관, 카페트 등 가정집에 필요한 모든 일을 다 했다. 나는 거기서 페인트 트라우마를 얻었다. 하는 족족 욕을 얻어 먹었고, 내가 끝낸 일을 보면 어김없이 혀를 끌끌 찼다. 무엇보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은채 일을 시켜놓고 '이렇게 밖에 못 해?'라는 그 경멸과 불만의 언저리에 있는 그 눈빛! 그 눈빛이 나를 힘들게 했다.페인트 칠하는 실력은 늘지 않았고, 흥미를 잃었다. 그러면 안 하면 되지, 왜 다시 페인터를 고민했을까? 역시나 사람이었다. 아내의 지인의 남편이 페인트 업계에서는 거의 최고 시급을 받는 분이신데, 잘 가르쳐주실 거니까 생각해보라고 일년 전부터 얘기를 들었었다. 아, 괜찮을까? 롤러질 삐뚤하게 하고, 선 생겼다고 또 욕 먹을 것 같은데... 체력적으로 괜찮을까? 8시간은 자야 하고, 밤 늦게 자는 내가 아침 6시에 일어날 수 있을까? 혹시나 일 하다가 쓰러지면 어떡하지?(그냥 힘들어서가 아니라 지병이 있다^^;;) 


 우선순위를 고민해보았다. 나는 아내와 아들, 딸이 있다. 그들을 먹여살려야 한다. 지난 6년 간 이곳에서 나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풀타임 일을 잡을 수 없었다. 필요할 때 불러주는 곳(주로 이사짐 센터)에 가서 불규칙적으로 일했었다. 그래서 생긴 뭐랄까. 그 자괴감? 같은 것을 잊을 수가 없다. 그래도 가정이 있는 40대 남자가 집에서 맨날 이러고 있어도 되는가? 말이 좋아 독서와 영화, 드라마를 즐기는 것이지, 실은 시간이 너무 많았다. 내 성향상 목표가 생기지 않으면, 뜬구름 잡는 식의 자기 성장을 도모하지는 못 한다. 그렇게 나는 페인트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우선순위 하나 붙들고 다시 페인트에 뛰어 들었다. (물론, 이 나라 특성상 기술 하나 배워놓으면 거의 평생 먹고 살 수는 있다. 먹고 살 수는! 그러니 기술 하나 배워놓다는 마음으로다가ㅎㅎㅎ) 


 직업이든, 취미든, 무슨 일이든 보통은 잘 할 때 재밌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못 하는데 점점 재밌다. 심지어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까지 든다. 이게 무슨 일일까? 내가 왜 이러지? 하는 생각과 함께, 열심히는 하지만, 잘 해보려고 매일 와서 유튜브도 뒤지고 하지만, 정작 현장에서 느려터지고, 테이프도, 페인트도 삐뚤빼뚤 하는데 뭔가 재밌다. 못 하는데 재밌다니. 살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그러면, 못 하는데 왜 재미가 있을까? (현장에서 이 생각을 하고서는 까먹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쓰고선 집에 돌아와 이렇게 쓰고 있다ㅎㅎ) 


6년간 묵은 자괴감 해결 / 우선순위 충족
자기 성장 (이라는 착각) 
함께 일하는 사람 
통장에 찍힌 잔고 증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내게 호기심은 채워주고, 두려움은 감탄으로 바뀐 몇몇의 순간들


 생각난 대로 쓴거라 각각의 의미를 줄 세운 것은 아니다. 확실한 것은, 직업을 통해 이렇게 다양한 것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을 참으로 오랜만에 해보았다는 점이다. 고작 5일 일 해놓고, 호들갑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5가지는 진심이다.


 자괴감 해결이 주는 이 통쾌함은 말로 다 못 한다. 묵은 때를 다 벗겨내고, 굶주렸던 위장에 음식을 채워넣고, 유리천장을 깨부수고 올라선 느낌이랄까... 한 맥락으로 묶이는 표현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이다 같은 이 느낌이 참 좋다. 어쩌면 트라우마 였던 페인트 작업을 통해 그간의 자괴감이 해결되어서 그 희열이 몇 배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보면, 사람에게 일(또는 직업)이 주는 의미란게 묘하다. 학교 가기 싫어서 이불 덮고 아픈 척 하던 어릴 때와는 다른 의미로 열 받게 하고, 눈치 주는 직장... 일 때도 있지만, 즐겁고, 돈 벌고, 사람들이 좋아서, 성취감이 생겨서 사람 살 맛 나게 하는 곳도 직장이 아닐까. 


 자기 성장은 약간의 오바스러운 착각 같기도 하다. 5번과 연결되어 있기도 한데, 내가 전혀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고, 이전 같으면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 할 영역이었는데, 희한하게 그런 세상에 눈을 뜨고, 내가 참여해서 소속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물론, 4번의 늘어난 통장 잔고가 주는 화학적인 쾌감은 말해본들 무엇하랴. 


 글을 쓰다보니 조금 진지해지는 기분이 드는데, 아마 3번은 내가 가장 진지해지는 부분이지 싶다. 내가 브런치에 글을 쓰게 된 것은 외로워서였다. 외국에서 살면서 마음 맞는 사람도 만나기 어렵고, 성격상 낯은 많이 가리고, 자존심은 나름 또 센 편이라, 사람을 잘 사귀지도 못 했다. 말 할 곳은 필요한데, 아내 외에는 이곳에서 친구가 없다. 생각해보니 친구가 진짜 단 1명도 없구나. 역시 마누라에게 잘 해야한다. 여하튼, 사람이었다. 그래서, 늘 소제목에 '사람, OO, 그리고 소통'이라는 말을 공식처럼 집어넣는다. 내가 사람들과 만나면 하고 싶은 주제들, 어떤 얘기들로 소통하고 싶은가가 OO인 것이다. 


 결국, 다시 사람으로 돌아왔다. 내가 함께 일하고 있는 팀장님은 무뚝뚝한데, 꽤나 말이 많다. 표정 변화는 거의 없는데, 뭔가를 물으면 혼자서 계속 답해주신다. 그런데 그 말이 회사에서 과장이 대리에게 하는 잔소리나 고등학교 때 학주가 학생한테 야단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결이다. 인격적이다. 5일 일하는 동안 내가 일하는 모습이 얼마나 답답하셨겠는가? 인격적이라는 표현은 착하거나 친절하다는 의도로 쓴 표현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배려가 깔려 있지만, 지적할 부분에 대해서는 정확하다. 그런데, 거기에 감정이 실려 있지 않다는게 포인트다. 팩트를 중심으로, 조곤조곤 얘기하신다. 언성을 높이지도 않고, 격한 말을 쓰지도 않는다.내가 어떤 부분이 잘 못 되었고, 이럴 경우, 회사와 고객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보라신다. 무엇보다


 "우리는 돈 받고 일하는 사람이야. 어려워도 해야해." 


 이 말이 참 와닿았다. 누군가에는 뻔한 얘기, 누군가에게는 꼰대의 말로 들릴지 모른다. 그런데 내게는 현재 나를 흔들어 깨우는 소리로 들렸다. 풀타임 일을 하게 되어서 너무 들떴던 것일까? 내가 하는 일이 기능적으로 완성도를 보여야 하고, 동시에 일정 수준이상의 속도를 내줘야 한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음이 퍼뜩 깨달아졌다. 


 '이렇게는 안 되겠다. 좀 더 집중하고, 의도적으로 바꿔보려고 해야겠어.' 


 아마 이런 류(?)의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팀장님의 무표정한 입술에서 나오는 그 말들은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가지는 통찰로 번역되어 내게 전달되었다.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중요하다. 한 사람을 일깨울수도 있고, 한 사람을 그냥 보내버릴 수도 있다. 


 앞서 들떠 말한 5가지 모두를 경험할 수 있는 직장이 얼마나 있을까? 반면에, 이 5가지를 경험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은 또 얼마나 있을까? 늘 주변환경이나 내게 주어진 조건에만 집중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본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인정하고, 변화시켜야 할 것은 무엇인지, 그것이 외부변수 보다 나 자신인데, 정작 그것을 놓쳤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다 보니 문득 오늘 하루가 감사하다.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또한 그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라인홀드 니버


20230511 19:47 처음으로 일값 받은 날


사진: UnsplashGabriella Clare Mar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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