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약밥 싫어!"
아빠의 혈당 관리를 위해 곤약을 섞어 밥을 지은 지 벌써 반년 정도가 되었다. 원래도 잡곡의 비율이 높았는데 곤약까지 더해지니 어지간히 맛이 없으신가 보다. 편 좀 들어주었으면 좋겠는데 이놈의 자식 놈들은 '고소하지 않아? 괜찮은데?' 하며 아무렇지 않게 먹으니 아빠도 그냥 드실 수밖에. 덕분에 식사량이 줄어 남산만 하던 배가 약간 들어갔으니 이걸 좋아해야 할지 어째야 할지 모르겠는 눈치시다.
대식가인 아빠의 사랑은 오로지 한식, 그것도 국과 밥에만 치중되어있다. 그게 칼칼한 빨간 국물에 새하얗고 찰진 쌀밥이면 더할 나위 없이 몇 그릇이라도 무한정 들어간다. 그렇게 부풀어 오르는 배를 보다 못한 엄마가 식이요법으로 특단의 조치를 내리신 것인데 우리 집 제1 권력자는 엄마라 아빠는 그 맛도 없는 밥을 별다른 말 없이 꾹꾹 삼키신다.
"쌀 밥 먹고 싶어.. 아니 엄마한텐 말하지 마. 그냥 너한테만 말하는 거야."
엄마 몰래하시는 이 넋두리를 몇 번이나 들었는지.
최근에 이사를 하게 되었다. 최대한 냉장고를 가볍게 비우려다 보니 이사 며칠 전부터, 최대한 빨리 짐 정리를 하려다 보니 이사 후 며칠까지, 약 2주 동안 쭉 어영부영 외식을 하게 되었다. 제일 신나신 건 역시 우리 아부지.
"오늘 퇴근하고 그 김치찌개 집에서 만나! "
"오늘은 그 부대찌개 집 가자!"
"오늘은 저쪽에 있는 그 칼국수 집!"
매일매일을 파티처럼(아빠한테만) 살다 보니 아빠 배가 다시 둥실둥실 떠올랐다. 보다 못한 엄마가 대충 정리된 식기만 가지고 간단히 식사 준비를 하셨는데 칼로리 감소의 주역인 곤약이 미처 준비되지 못한 터라 김이 모락모락 나고 먹음직스러운 보리빛의 잡곡밥이 완성되었다(평소보다 잡곡 비율이 현저히 줄어 윤기가 좔좔 흐르는 채로). 아, 밥 짓는 냄새는 왜 이렇게 포근한지.
그날, 오빠랑 아빠가 세 공기씩 해치웠다. 슬슬 외식에 지치던 차에 물컹물컹하고 아무 맛도 안나는 곤약까지 빠진 집밥을 먹었더니 고삐가 풀린 것이다. 그 모습을 흐뭇한 듯 안쓰러운 듯 보람찬 듯 걱정되게 바라보시던 엄마가 결의에 찬 목소리로 그날 저녁에 마침표를 찍으셨다.
"안 되겠어. 내일부터 다시 밥을 맛없게 만들어주겠어!!"
안돼.. 성대하던 아빠의 파티는 그렇게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