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약해도 괜찮아
( 2주 전부터 맴돌던 나약할 인간의 권리에 관해, 더 잘 쓰고 싶어서 움켜쥐고 있었으나, 일단 써본다. 아마도 계속해서 퇴고가 진행될 가능성이 높은 글이니 참고)
일주일에 한 두 편, 넷플릭스 '더 크라운' 에피소드를 본다. 평소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에 체력이 남아있다면 보곤 하던 tv를 다리를 다치고 집에 하루 종일 있는 날이 많음에도 거의 보지 않는다. 그래도 가끔, 넋 놓고 있는 것도 지겨울 즈음 보고 싶은 건 '더 크라운'이다. 불필요한 긴장을 일으키는 내용이 없고(폭력적이고 공포나 범죄, 막장 스토리는 보면 힘들다) , 불편한 진실은 한 번씩 건드려주기도 하고, 어떤 이(왕가에 속한 사람 및 정치 인사들)의 삶의 방식을 깊이 있게 들여다봄으로써 우리 인생에 대입해가는 맛이 있었다.
칩거(?) 생활이 두 달 즈음 다가오는 어느 날 , 시즌 4의 5회 [실직자 ] 편을 보았다. 마거릿 대처가 국외 영토 수호를 위해 전쟁에 힘쓰고 있을 때, 영국 내에 실직자가 늘어나고 그 실직자들 중 한 명(마이클 페이건)이 여왕의 침실을 잠입해 지금 영국의 문제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내용이었다. 조금 거친 환경 속에서 거친 행동을 하는 페이건이 왕비에게 하는 말은 꽤나 핵심을 찔렀다. 현 회피하고 막연한 행복감을 주입시키고, 다른 의견은 주의 깊게 듣지 않는 의원들보다 필요한 말을 했다.
페이건: "공동체 의식과 서로에 대한 책임 의식, 배려의식도 전부 사라지고 있다고요. "
여왕: "그건 과장인 것 같군.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 배려하고 정부에 세금을 납부하지."
페이건: "그 돈을 그 여자(대처)가 불필요한 전쟁에 써버리고는 행복감이 다시 찾아왔다고 선언하더군요. 그런데 정작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은 일할 권리와 아플 권리 , 늙을 권리, 나약할 인간의 권리인데 다 없어요. "
실직과 이혼으로 삶이 자꾸 나락으로 떨어지는 페이건은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퍼레이드를 하는 대처를 티비로 보게된다. 저들이 말하는 승리과 행복은 대체 무엇이길래, 자신은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지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생각했으나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에게 실패자라고 또는 정신이상자라고까지 했지만, 그는 그 상태에서 어떻게 벗어나야할지 몰랐고, 계속 나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가 의도했던 삶의 모습은 그런 상태가 아니었다. 일을 하고 싶었고, 가족을 찾고 싶었고, 잘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니가 치열하게 죽어라고 노력해야해. 그렇지 못한 건 무능하고 나약한 니 탓이야!' 라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어떤 사람들은 노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자신을 모두 소진할 때까지 버텼을 테고, 어떤 이는 포기 했을 테고, 어떤 이는 반항했을 테다.
여태껏 나는 일하면서 아이를 돌보며 현 상태의 지속 가능함을 실험하면서 고군분투 해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기도 했다. 때론 나약해지는 스스로를 자책하지 말자고 다 잘할 수 없다고 타이르고 다시 일어나곤 했다. 그러다 지금은 다리를 다치고서 부상과 함께 나약해진 나의 모습이 또 거대한 벽과 싸워나가는 느낌이었다. 엄마(이자 나)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질 것처럼, 나약함의 정 반대에서 마치 엄마라는 초능력을 쓰지 않으면 의무를 저버린 것처럼 발바닥에 힘을 딱 주고 버티고 서 있었고 걸었다.
그러다 하루아침에 다리를 다쳤고,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서 일을 다 연기시키고 여기저기 아이들을 부탁했다. 그러다 머리에 대상포진까지 얻게 된 것이다. 에너지가 넘치던 나는 날이 갈수록 버티는 에너지가 소진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약해지지 않으려고 멘탈을 꽉 붙들어 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나는 인정해야 했다. 나는 지금 도움을 받을 상태이며, 지금의 상태를 부정하지 말자고.
다리를 다쳐서 이동이 불편한 상황에서, 대상포진으로 인한 두통 및 전신 신경통을 함께 겪으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로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흘렀다. 증상이 다양하고 다리 수술까지 앞둔 내 상태를 귀담아듣는 의사가 없어서, 대상포진을 알아내기까지 병원 3군데, 치료를 위해 3군데의 병원을 돌아야 했다. 의사들은 하나같이 대충이었고, 자신의 진단에 질문을 던지는 순간 기분 나쁜 내색을 하기 바빴다. (나는 단지 내 상태들을 설명하면서 덧붙였을 뿐이더라도) 의사가 뭐하는 사람인지 본분을 잊고, 아픈 사람들을 대상으로 자기 과시와 오진을 해대는 것에 진절머리를 치고 있을 때였다. 택시로 병원을 오가며 '아프기도 힘들구나, 맘 편히 아플 수도 없구나.' 라는 생각을 여러번 했다. 또한 말귀도 어둡고 이해력도 떨어진 노인들이 병원에서 홀대받는 모습을 마주하고서, 가슴이 턱턱 막혔다.
죽음을 문 앞에 둔 허물어져 가는 육신에 꽂힌 여러 개의 링거 줄과 인큐베이터 안에서 주삿바늘을 꽂고서 살아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작고 작은 신생아의 모습 앞에서 삶은 다르지 않았다. 그런 모습들은 자꾸만 내게 불편하지만 마주해야 하는, 그러나 옆으로 치워두었던 삶을 마주 하게 했다. 치열한 삶의 정 중앙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서 삶을 바라보고 거기서 소외되고 버티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 시야가 확장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정말 평범해서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전투 중이었다면, 그럼으로써 옆을 보지 못했다면, 내 눈의 각도가 조금만 틀어져도 보였을 수많은 것들과 마주하는 중이었다. 특히나 아프고 늙은 사람들의 모습들 속에서, 나의 안온하지 않을 미래가 보였다고 해야 할까. 나는 언제든 아플 수도 다칠 수도 있고, 거부할 수 없이 늙어가는 생명이었으니까. 가장 연약한 상태로 태어나, 그런 상태로 떠날 육신이었다.
[더 크라운]에 나오는 페이건이 말한 위 4가지 권리(일할 권리와 아플 권리 , 늙을 권리, 나약할 인간의 권리)를 잊을까 메모장에 적어두었다. 특히 나약할 인간의 권리라는 말을 마주하고서 묵직한 뭉클함과 마주했다. (나약할 권리 안에 아프고 늙는 것을 포괄 하고 있지만, 아프거나 늙지 않아도 나약한 상태에 놓일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 사람들은 나약할 인간의 권리에 대해, 보호보다는 질책을 내세우지 않았나. 모두가 동기부여하고 나아가고 성장하는 사람들에게 치중되지 않았나. 나약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보듬고 단단하게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과 지지를 주고 있었나.
어쩌면 내가 그동안 더 잘 해내 보겠다고 일도 육아도 나의 성장도 붙잡고 있으면서 간과했던 건, 나약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인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나약한 것은 잘못인가? 상태일 뿐이지 않은가? 사람은 언제든 나약해질 가능성과 나약해질 권리가 있고, 또 때가 되면 그 나약함을 벗어나거나 조금 길게 머무를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페이건이 말한 그 '나약할 인간의 권리'가 현재 우리 사회에 정말 필요한 키워드이자, 인정해야 할 권리라 생각하며,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은 발버퉁쳐도 넘어서지 못할 큰 벽과 마주한 것 같은 막막한 지금을 조금 편안하게 지나가고, 그다음을 모색할 수 있는 힘을 쌓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나약한 상태의 사람이라는 것은 결국 요즘 흔히 말하는 '약자'를 의미할 수도 있겠다. 약자에 대해 어떤 잣대로 평가와 비난을 내세우기보다 이들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과 더불어 그 시간을 버틸 수 있도록 사회적 제도도 함께 필요하다. 아기와 노인 장애인뿐만 아니라 청년과 장년층 모두 언제나 나약해질 가능성이 있으며 그것은 잘못이 아니고 과정의 하나임을 인지 해야 하자 않을까? 언제나 변화는 현재의 상태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진정한 시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