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안 Aug 18. 2021

사유를 시작했던 최초의 기억으로

서로의 단어를 알고싶어 하는것


  입추가 지나고 더위가 한풀 꺾였어요. 은진님이 있는 산천에는 아마도 간간히 선선한 바람이 불겠지요? 저는 그간 아이 방학이 한 달째 이어져 오고 있는 데다가 미뤄둔 업무들을 하나씩 시작하느라 조금 바쁜 시간을 보냈어요. 그래서 보름이라는 시간(서신 마감일)이 불쑥 지나버렸네요. 그 시간들을 보내면서도, 어떤 답변을 드릴지 계속 마음에 품고 있어요. 그 마음이 왠지 저를 계속 긴장하게 하고, 글을 쓰게 하는 동력이 되기도 하네요.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환기가 된다 해야 할까요?  




어떤 기억을 가지고 천국으로 가고 싶으신가요?


  <원더풀 라이프>는 보려고 세 번이나 시도하고, 세 번 다 잠이 들어서 결국 끝까지 보진 못했어요. 은진님 서신을 받고 다시 도전해서 어김없이 잠들었지 뭡니까. 하지만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서신을 받은 날 떠오르는 장면을 기록을 해두었답니다.


  제 지난 삶에서 하나의 기억만 고른다면, 10살 때 춥지도 덥지도 않은 어느 날 창 밖을 보던 제 뒷모습이 떠올라요. 태어나서 초등학교까지 살던 작은 집 이층에서 창틀에 팔을 괴고 구름 지나가는 모습을 하염없이 말 그대로 하염없이 보곤 했어요. 그때가 제가 사유라는 걸 제대로 시작하게 된 시기인 것 같기도 하고요. 구름이 바람 따라 움직이고 다음 구름이 하늘을 채울 때까지 바라봤어요. 그리고 그때 생각했죠. 구름을 그리고 구름 사진을 찍고 구름을 보면서 느낀 시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요.  


  대학 졸업반일 때, 어떤 수업에서 자신을 설명하는 프레젠테이션을 했었어요. 그때 저는 “어떤 방법으로든 제가 받은 감동을 표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했는데 그 시초는 구름이에요. 그 말에 어떤 학생이 해줬던 피드백도 기억에 남아요. 되고 싶은 사람이 너무 추상적이라더군요. 그때 다시 대답했죠.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싶지 않다고. 저는 어쩌면, 그 추상적인 꿈을 계속 품고서 실험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뭔가 평화로운 시간을 떠올리면 그때로 돌아가요. 열 살만이 했던 고민이 있었겠지만 순수한 시절의 마지막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할까요?  


  지금은 혼자보다 가족을 이루고 살고 있기 때문에, 혼자만의 시간을 마주할 때 좋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부채감이 저를 완전히 자유롭게 하진 못하는 것 같아요. 물론 가족과 함께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풍부한 감정과 사랑들이 있지요. 하지만 저는 자주 그때의 자유로움과 순수한 저의 모습을 안고서 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어떤 이를 혼자 남겨두어 미안한 마음 없이 바람의 존재를 구름의 움직임으로 확인하는 그런 온전한 아름다움이 가득한 순간을요.  




이것 없이는 나를 설명할 수 없는 단어는?


  최근에 애정 하는 정혜윤 작가님의 신작 [슬픈 세상에 기쁜 말] 이란 책을 읽고 있어요. 그 책의 서문에는 "이것 없이는 나를 말할 수 없는 단어"를 찾아내 설명하는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그러면서 작가는 이야기하죠. 


우리가 서로의 단어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감동적인 면이 있다. 세상은 열심히 우리의 이름과 고유성을 지운다. (...) 내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존재한다는 것 역시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현실'이라는 단어를 쉽게 쓰지만 내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것이 각자의 가장 무거우면서도 놀라운 '현실'이다. 생각할수록 놀라움의 연속이지만 우리의 고유성은 계속 하나의 범주로, 하나의 숫자로 지워져 만 간다. 그러나 세상이 우리의 고유성을 지울수록 자기 자신만은 자신의 고유성, 내면의 ' 살아 있는' 어쩌면 아직은 '이름 없는' 뭔가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도 고유한 무엇인가를 품고 있다고, 우리가 궁금해할 무엇인가를 품고 있다고 믿는 것은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는 거의 '저항'이라고 부를 만한 일이고 최고의 존중이다. 



   <원더풀 라이프>를 보고 은진님이 던진 질문에 대답하면서 '이것 없이는 나를 설명할 수 없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 보았어요. 하나는 정말 어렵고도 어려우니까, 열 개의 단어를 선택해보았죠. 


가족 , 친구, 책, 음악 , 구름, 바다, 노을, 사진, 혼자 있는 시간 


저를 지탱해 주고, 또 저로 존재하기 위해 이 단어들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최근 저는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시간' 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이란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만큼 사람들과 나누는 에너지도 좋아하지만 그 에너지 충전은 혼자 있는 시간에 가능하더라고요. 그 시간이 부족할 땐 어김없이 불안해지고, 힘들다고 느끼곤 했어요. 이게 결혼과 육아를 겪으면서만 느끼는 것은 아니고, 20대 때에도 혼자이고 싶어서 여행을 홀로 떠나곤 했더군요.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사유하는 시간, 그 최초의 기억이 10살 때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그때인가 봐요. 


  은진님에게 있어서 '이것 없이는 나를 말할 수 없다'라는 단어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서로의 단어를 궁금해하는 것이 우리를 규정하는 보편적인 단어들(이를 테면 여자, 엄마, 어떤 직업)에서 벗어나 그런 편리한 분류에 길들여진 사회 분위기에 '저항'하고 또 사랑하는 방법이 되길 바라봅니다.  


  저는 여전히 은진님에 대해 많이 모르고, 그래서 더 궁금하거든요. 더 잘 알기 위해 우린 예상보다 꽤 많은서신을 주고받아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이렇게 야금야금 알아가는 맛이 있네요.  


  저녁이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 설레기 시작했어요. 저는 가을을 정말 좋아해요. 기분 좋은 선선한 바람이 부는 어느 날, 바람처럼 불쑥 산천에 찾아가서 장작 타들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이야기할 날을 상상해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의 가장 소중한 추억을 선택해주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