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고개로'에서 만나요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는 그림형제의 <브레멘의 음악대>를 패러디한 그림책입니다. 원작을 재해석한 이야기가 얼마나 참신할 수 있을지 기대 반 우려 반으로 책 앞에 앉습니다. 우선 책의 표지에 담긴 부정문의 제목과 주인공들의 뒷모습에서 애처롭고 쓸쓸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들이 서로 다른 공간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는데요. 별들이 반짝이는 푸른빛의 하늘 아래 펼쳐진 신비로운 보라색의 도시, 아마도 브레멘이겠죠. 마치 이들 모두가 그 아득한 도시를 바라보며 하루를 견뎌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주 비좁은 장소에 갇힌 채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밝고 희망적인 그림책을 좋아합니다. 아마도 아이에게 읽어주는 경우가 많아서겠죠. 긍정적이고 교훈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은 아이가 상처받지 않고 행복하기만을 바라는 마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좋은 것만 주고 싶은 부모 마음이야 당연한 것이니까요. 그럼에도 삶의 다양한 측면을 보고 알아가는 것 또한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이든 어른이는 우리 모두는 같은 현실을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런 관점에서 이 그림책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기대가 됩니다.
모범 운전사 당나귀씨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합니다. 식당에서 일하던 바둑이씨는 식당이 이사를 가면서 버려집니다. 편의점에서 일하던 야옹이씨는 얼굴의 상처가 험악해 보인다며 실직을 하게 되고 거리에서 두부를 팔던 꼬꼬댁씨는 단속에 걸려 쫓겨납니다. 그나마 당나귀에게는 슬퍼하며 배웅해주는 동료들이 있지만 나머지 친구들은 덩그러니 홀로 남겨졌습니다.
멀리서 바라본 이들의 모습은 한 없이 작고 초라해 보입니다. 단조롭고 무심한 풍경으로 내던져진 이들은 멍하니 자신의 몸을 겨우 지탱하고 있습니다. 경직되고 둔탁한 발걸음과 가느다란 호흡이 느리게 이어집니다. 일자리를 잃어버린 이들은 갈 곳이 없습니다. 막막한 길 위로 도시의 메마른 공기만이 이들을 감싸고 있습니다.
이들은 우연히 같은 지하철을 탑니다. 아니 어쩌면 길을 잃은 이들에게는 필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서로를 알게 된 이들은 같은 곳에 내려 같은 길을 걸어갑니다. 아주 많은 계단을 올라가야 가는 높은 곳으로요. 허름한 집들 사이의 계단을 뒤뚱뒤뚱 오르며 마침내 도착한 곳은 하늘과 아주 가까운 동네, '꿈고개로'입니다.
우리가 흔히 '달동네'라고 부르는 곳이 등장합니다. 대놓고 말은 못 하지만 인생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라 여기는 동네입니다. 혹시 가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곳 그래서 외면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동네의 길 이름이 역설적이게도 '꿈고개로'입니다. 예상치 못했던 이 이름이 헛된 망상이나 거짓 위로가 아니길 바라며 긴장된 손끝으로 책장을 넘깁니다.
그곳에서 이들은 할 일이 없어진 도둑들의 이야기를 엿듣게 됩니다. 열심히 살지 못한 걸 후회하는 도둑들에게 이들은 이야기합니다. 자신들은 열심히 살았는데도 할 일이 없어졌다고. 열심히 살아도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도둑들은 실의에 빠진 채 이들과 마주 앉습니다. 그러다 문득 밀려오는 배고픔에 각자가 가진 음식재료와 도구를 가지고 찌개를 끓여 먹습니다. 함께 식당을 하는 맛있는 상상을 하면서요. 이야기의 결말은 뒷면지에 담겨 있습니다. 각자가 홀로 존재했던 분주한 도시가 그려진 앞면지는 서로가 함께 만들어가는 활기찬 일상의 뒷면지로 마무리됩니다.
열심히 살았는데도 할 일이 없어졌다는 말은 우리의 냉혹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할 일을 지키기 위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려 쉼 없이 노력합니다. 뒤쳐지거나 실패하는 순간 우리에게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고 생각하면서요. 그래서 할 일을 잃어버린 이들의 인생은 당연히 불행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브레멘에 가지 않아도 가능한 행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로의 처지에 관심을 기울이며 시작된 만남이 각자의 것을 나누어 차려낸 배부른 식사로 이어지는 장면이 바로 그것인데요. 남들이 보기엔 하찮은 것들이었지만 그 작고 볼품없는 것이 모여 따스하고 맛있는 밥 한 끼를 만들어 내는 장면은 잊고 있던 우리의 심리적 허기를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서로의 마음과 일상을 나눌 수 있는 우정과 연대라는 걸 가르쳐 줍니다.
그림책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는 쓸모없어 버려진 존재들의 쓸모 있는 삶을 꾸밈없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인간성이 상실되어 가는 잔인한 사회를 고발하면서 동시에 소외된 이들을 향해 주저하지 않고 다가갑니다. 부조리한 사회에 지지 않고 함께 연대하며 삶을 개척해가는 이들의 용기를 보여줍니다. 모두가 똑같은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다른 삶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연말이 되면 으레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효율성과 생산성에 따라 지난 시간을 평가합니다. 더 열심히 살지 못한 자신에게 실망하고 더 많은 성과가 없는 현실에 좌절합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는데 나는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아무도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불평하지만 결국엔 내가 나를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걸 발견합니다.
저도 브레멘에 가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 상태면 아마 평생 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브레멘보다는 '꿈고개로'에서 소중한 인연들과 같은 꿈을 꾸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어쩌면 내 안에 보잘것없다고 여겼던 것을 내놓으면 가능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꿈고개로'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