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날의 시선 12
길을 걷다가 쥐똥나무를 보았다. 제법 큰 나무에 까맣게 익은 열매가 단단하게 매달려 있다. 간혹 초록을 지닌 열매도 보이고 약간 보라색을 띤 열매도 있다. 타원형의 이파리는 가을 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쥐똥나무의 존재가 두드러지는 시기다.
봄을 지나 여름, 가을이 무르익을 때까지도 쥐똥나무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자잘한 초록 열매가 이파리에 묻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가을이 깊어 어디선가 첫눈 소식이라도 올 무렵 그제야 쥐똥나무는 보인다. 초록의 열매가 까맣게 영글어가는 요즘이면 쥐똥나무는 파란 하늘을 이고 까만 열매를 여한 없이 달고 나 여기 있소! 전 존재를 흔들어대며 구도자처럼 오롯이 겨울을 난다.
열매는 겨울이 다 갈 때까지 떨어지지 않는데, 이미 이파리는 우수수 떨어져 빈 가지만 지니고 있으면서도 지독하다 싶을 만큼 제 열매를 놓치지 않는다. 그러다가 봄이 와 대기가 느슨해질 무렵이면 비로소 앙상하고 쭈글쭈글한 열매를 땅에 떨어뜨리는데 무르지 않은 그 모습이 영락없는 쥐똥이다.처음 쌌을 때와 다르게 겨울을 나면서 수분을 날린 마른 쥐똥이 딱 저렇다. 오로지 단단한 씨앗 한 개만 움켜쥔 모습이다.
오가다 쥐똥나무를 보면 으레 떠오르는 스승이 계신다. 어느 날 나뭇가지를 한 개 들고서 강의실에 들어온 스승이 말씀하셨다. 이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아는 사람 있느냐고. 아무도 없었다. 모두 꿀 먹은 듯 입을 다물었다. 까만 열매가 우리를 비웃으며 조르르 흔들렸다. 말씀인즉 지금 한창인 계절 나무 한 그루 정도는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느냐며, 그래야 좋은 글도 나온다는 의미의 말씀이었다. 즉 주변의 사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라는 말씀으로 알아듣고 이후로 나는 쥐똥나무뿐만 아니라 식물과 나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작가로서, 나는 항상 먼 거리를 응시한다. 어떤 대상이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것을 바라본다. 사람들, 사건들, 날씨, 상황... 이렇게 사물에 초점을 맞추는 행위!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관찰하고 받아 적는 것! 하나의 이미지, 더 명확히 보고 싶은 어떤 대상을 발견, 쌍안경으로 초점을 맞추고 시야에 들어온 것을 묘사, 주위를 기울여 그 존재를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고, 종이 위에 내려놓으면 된다.’
내 독서노트의 문장을 다시 읽는 걸 좋아한다. 어떤 작가의 독백을 교과서 삼아 펼치는 시간을 갖는다.
시골에서 자라 꽃이며 식물, 나무를 좀 안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다. 세상의 꽃과 식물은 많았고 나무는 언제나 멀리서 제 이름을 불러주길 기다렸다.
무엇이든 알기 위해 몸을 기울이면 각별한 애정이 생긴다. 관심을 받아들인 사물은 나를 향해 마음을 열기 때문이다. 이름을 알려주고, 사는 곳과 환경을 가르쳐주며 자기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을 구분하게 한다. 또한 그로 인하여 내가 얼마나 풍요롭게 변화하는지 눈여겨본다.
사람이나 식물도 제 이름을 불러 주고 기꺼이 내 안에 들일 때 비로소 서로 쌍방향 관계를 맺는다. 마음의 지평이 확장된다.
쥐똥나무는 그렇게 내게로 왔고, 이맘때면 자주 볼 수 있는 쥐똥나무가 열매를 지니고 온 겨울을 혼자 날 때 가끔 찾아가 눈길을 주는 일도 생겼다.
몇 사람에게 쥐똥나무 이름을 알려주었다. 그들과 쥐똥나무 얘기를 나눈다. 그리하여 쥐똥나무는 우리의 나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