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날의 시선 11
가만히 저녁이 옵니다.
한낮의 빛을 소리 없이 밀어내면서 조용히 저녁이 옵니다.
오늘도 잘 견디며 수고했다고, 무사히 여기까지 왔다고 저녁이 다정한 손을 내밉니다. 저녁 온기가 전해질 때까지 그 손을 잡습니다. 당신도 그러하기를 바랍니다.
저녁은 집을 떠난 누군가 본능처럼 집을 향해 돌아오는 길 위에 서 있는 시간입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의 마음과 저녁에 집에 돌아올 때의 마음은 분명 다릅니다. 아침은 앞만 보았다면, 저녁은 살아온 언저리를 짚어보는 시간입니다.
저녁은 서성거림을 다독이는 시간이면서 서성거림과 온전히 마주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길게 늘어져 있던 오후 햇살이 빛 한 조각 덜어내는 사이 저녁은 슬그머니 다가와 자기의 영토를 펼칩니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 서서히 그 친근한 얼굴을 내밉니다.
이렇게나 느슨해진 마음이라면 무엇이라도 호명하고 싶은 저녁입니다. 그리운 이름들, 이제 세상에 없는, 더는 마주할 수 없는 사람들, 애쓰는 얼굴들, 수고한 어깨, 다부진 결기로 총총한 눈빛, 위로받고 싶은 마음과 기꺼이 다독임을 받고 싶은 누군가를 불러내 다독다독 어깨에 내려앉은 어둠을 쓸어주고 싶습니다. 저녁이니까요. 세상 모든 어둠이 편견 없이 내려와 저토록 넓은 품을 펼치고 있으니까요.
저녁이 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더 짙은 어둠을 뒤척이느라 안간힘 쓰는 소리입니다. 저녁이 오면 위로를 받고 싶습니다. 신산했던 하루의 시간을 벗고 어둠의 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어떤 노래 한 구절이 못내 마음을 쓸어줍니다. 저녁은 이렇게 낮은음으로 옵니다. 괜찮다고, 저녁이 또 이렇게 오지 않았느냐고 누군가 허밍을 읊조립니다.
아침처럼 저녁이 오면 저는 더욱 살아내고 싶습니다. 저녁은 밤을 물고 있으나 결코 칠흑 같은 밤하고는 결이 다른, 아주 잠깐 머무는 시간입니다. 그러한 저녁에 저는 많은 걸 생각합니다.
베란다에 어둠이 내리면 제라늄은 어둠으로 피어납니다. 저무는 들녘에 서 있으면 커다란 어둠이 둥근 어깨를 어루만집니다. 달리는 차 안에 음악이 흐르는 저녁이면 옆 차선을 달리는 낯선 누군가가 피붙이 같은 뭉클함으로 다가옵니다. 이 저녁, 나와 같은 시간을 살고 있다는 인류애 같은 것입니다.
오늘 저는 누군가의 모든 다정한 저녁에 말을 건넵니다. 같이 마주할 수 있어서 고맙다고, 세상 끝 어디에선가 저녁이 오거든 문득 한 사람을 떠올려 보시길 권합니다. 그게 당신이든 타인이든 상관없습니다. 어둠이 내리는 저녁을 같이 본다는 것이 얼마나 근사한 일인지, 당신과 함께하는 저녁이 있기에 우리는 투명한 아침을 맞이할 수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가슴 떨리는 일인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텅 빈 운동장 회전 그네 옆 축구공 한 개가 어둠을 굴리고 있습니다. 누군가 놓고 갔을까요? 아니면 어디선가 굴러온 공일까요? 축구공의 출처가 궁금하지 않습니다. 다만 온전하게 어둠이 내려, 밤이 꽉 차오를 때까지 어둠을 놓지 않으려는 제 의지에만 신경 줄을 걸어놓고 싶습니다.
바란다면 제 모든 다정한 저녁의 위로를 당신과 함께 향유할 수 있기를, 오늘, 저녁이 가기 전에 그럴 수 있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