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날의 시선 51
아침저녁으로 공기가 다르고 바람결이 다르다. 그것만으로도 운신의 폭이 훨씬 넓어졌다. 여유가 생겼다. 느슨하고 가볍게 나부끼는 느티나무 이파리 사이로 여름은 밀리고, 그 사이 틈새 선물처럼 무화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무화과를 기다리는 일은 즐겁다.
초록색의 아오리 사과가 어느 날 쑥 들어가고 붉은 홍로가 나올 무렵 무화과는 과일 가게나 마트 진열장에 슬쩍 놓인다. 마트에 들러 무화과를 찾으니 조금 더 있어야 나온다며 열흘 남짓 기다리면 나올 거라는 직원의 말에 허탈했었는데, 지난주 농협 로컬 매장에서 무화과를 보고 같이 간 일행 모두 1박스씩 차서 차에 실었다.
무화과는 꽃이 없다고 하지만, 반으로 잘랐을 때 보이는 열매 안의 붉은 부분이 꽃이다. 한 개를 먹으면 무화과꽃 한 송이를 먹는 것이다. ‘이 맛도 저 맛도 아니다.’라며 먹지 않는 사람도 있고, 아예 먹어 볼 시도조차 안 한 사람, 좋아해서 여름이 빨리 가기를 내내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
무화과는 여느 과일에 비해 순한 맛이어서 좋다. 9월이 특히 제철이어서 몇 번 사 먹으면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만다. 얼려서 먹거나 냉동해서 먹기도 한다는데 나는 그저 잠깐 먹고 다음 해 이맘때를 손꼽아 기다린다. 무화과는 마치 볕이 나 있는 날 잠깐 오다가 그친다는 여우비와 같아 아쉽고 그립지만, 계절에 머무는 동안 부지런히 먹어두기로 한다.
무화과는 ‘이집트에서 약 4,000년 전에 심은 기록이 있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과수로 알려져 있고, 구약성서에 의하면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열매(지혜의 나무 열매)를 따 먹고 자신들의 벗은 몸을 나뭇잎으로 가린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때 쓰인 나뭇잎이 바로 무화과이며 지혜를 상징하는 나무로 여기기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맛도 밍밍한 편이고, 과육도 한없이 물컹해서 보관도 쉽지 않아 상하기도 잘하는 과일이 이렇게나 오랜 유래가 있었구나 싶어 새삼 다시 보인다.
예전에 시댁 뒤꼍에 한 그루 있었는데 그때는 먹는 과일인지 몰랐다. 추석 명절에 서울에서 큰 시숙이 내려오시면 꼭 먼저 그 나무 밑으로 가셨다. 두 손에 몇 개 따 쥐고선 혼자서만 드셨다. 이미 무화과의 맛을 알고 계셨다. 얼마나 맛 있었을까. 사실 관심도 없었다. 세월이 흐르고 난 후에야 그렇게나 좋은 과일을 혼자서 드셨나? 싶은 마음에 약간 억울하다. 그러나 정작 다른 사람은 아무도 무화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지금 그 나무가 온전히 있으려나, 문득 궁금해진다. 작은 시숙이 관리하는데 한 번 여쭤나 볼까?
남도 쪽으로 여행을 가면 길가에서 무화과를 팔고 있는 풍경을 익숙하게 볼 수 있다. 제철 과일을 현지에서 사 먹는 맛은 각별하다. 전라남도 영암이 우리나라 무화과 생산량의 70% 이상을 차지한다고 한다. 언제 어디서든 제철 맞은 무화과가 손짓하며 부른다. 담박한 맛으로 조용히 구월을 유혹한다. 힘들고 지쳤던 지난여름의 수고에 대한 보상이 무화과의 향긋함으로 다독여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