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브라이튼에서 생긴 일 - 네이키드 바이크 라이드
주빌리 도서관 가는 길에 그 일은 벌어졌다. 내 눈을 의심하고 다시 쳐다봤지만 그건 분명 홀딱 벗은 남자의 알몸이었다. 위풍당당 자신만만한 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던 중년의 백인 남자는 축 늘어진 뱃살과 연분홍색 몸을 드러낸 채 배낭을 메고 운동화에 양말을 신고 있었다.
'브라이튼엔 게이만 바글거리는 게 아니었어. 노출증 변태도 있구나.'
변태를 벌건 대낮에 길바닥에서 맞닥뜨려 가슴이 철렁했지만 길을 걷던 다른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은 듯 지나쳤다.
'뭐지? 분명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어.'
아니나 다를까. 괴성과 웃음소리가 들리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수많은 나체들이 분수대에서 허연 몸을 드러낸 채 샤워를 하고 있었다.
두 번째 쇼크가 왔다.
'내가 지금 뭘 본거야? 꿈인가?'
여자고 남자고 다 벗고서 신이 나 물놀이하는 분홍빛 인파를 보니 내가 유럽에 있음이 실감 났다. 맞다. 여긴 영국이지. 하여간 이상하고 재밌는 나라야. 브라이튼에서는 심심할 틈이 없었다. 특이한 사람들도 많고 예쁜 장소도 발길 닿는 곳마다 즐비해 있었다. 그런 곳의 배경이 아름다운 바닷가라면 낭만과 환상을 쫓아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건 당연했다. 게다가 영국의 게이수도가 아닌가!
그런데 속옷 한 장 걸치지 않은 알몸의 백인들은 벗겨놓고 보니 그 몸이 그 몸이고 죄다 창백하고 탄력 없는 피부를 지닌 몸뚱이들이었다.
'백인은 무슨. 연분홍인이네.'
대놓고 드러내놓은 맨살을 못되게 품평하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티 안 나게.
쇼킹했던 나체아저씨와 분수대 샤워사건을 뒤로하고 주빌리 도서관에 도착해 3층 창가에 자리 잡았다. 미술서적을 보며 연필로 작은 스케치북에 드로잉을 하고 있다 무심결에 창밖을 내려다보니 거리는 자전거 타는 행렬로 꽉 차 있었다. 그런데 자전거 탄 사람들이 유난히 빛이 났다. 그렇다. 사람들이 모두 알몸으로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세 번째 쇼크가 찾아왔다.
'여러분! 나체로 자전거를 타며 한없는 자유를 느껴보세요.'가 이 행사의 슬로건인가? 자기 눈에만 멋진 몸을 보여주려 벗지 못해 안달 난 자기애 가득한 사람들과 보수적인 문화와 문명사회를 비판하려 벗은 사람들, 옷이 그냥 거추장스러워 하루만이라도 동물처럼 그저 본능적으로 살고 싶은 사람들은 다 모인듯했다. 알몸 자전거행진은 꽤 오랫동안 거리를 가득 매웠다. 자전거 타는 사람들의 환한 궁둥이가 끊임없이 지나갔다. 그림에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내 눈은 자전거 탄 엉덩이들만 바라보고 있었다.
두꺼운 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타도 몹시 불편한 엉덩이 살 부족한 내 입장으로선 전혀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그다지 아름다운 축제로 보이지 않았지만 알몸 참가자들은 다들 이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는 듯 굉장히 뿌듯하고 행복한 표정이었다. 자유를 외치며 알몸으로 자전거탈 수 있는 날은 진정 흔치 않으니까.
주최자는 이렇게 말했다.
The Brighton Naked Bike Ride shows solidarity with our naked planet. Our nudity symbolises our fragility, both as individuals and as one of many species. It also expresses our power, courage, freedom and common humanity.
브라이튼 알몸 자전거 타기는 우리의 벌거벗은 행성과의 연대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누드는 개인으로서 그리고 많은 종 중 하나로서 우리의 취약성을 상징합니다. 이는 또한 우리의 힘, 용기, 자유, 공통의 인류애를 표현합니다.
https://www.thesussexnewspaper.com/theyre-time-brighton-naked-bike-ride/
미국의 한 명문대학교에서도 알몸으로 달리는 이벤트가 있었다. 그에 대해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자유분방한 미국의 대학이라고 하더라도 벌거벗은 채로 달리는 행사에 참가한 학생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그들은 왜 그럴 수 있었을까? 바로 군중이라는 상황의 힘 때문이다. 이 학생들도 혼자서는 결코 옷을 벗고 캠퍼스를 뛰지 않는다. 그러나 군중이라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 사람들은 마치 투명인간이 된 것과 유사한 심리상태를 경험한다.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평소에는 자제하던 행동들, 심지어 충동적이고 비윤리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군중 속의 개인이 바로 그런 심리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최인철의 <프레임> 중에서
얼마 전 접한 뉴스에서는 런던의 지하철에 오른 시민들이 하의를 입지 않은 채 인터뷰에 응하고 있었다. 알몸자전거축제는 6월이라 춥지 않았겠지만 하의 실종 지하철 타기 도전은 겨울에 진행돼 미쳤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다행인 건 참가자들이 그나마 속옷은 입고 있었다. 팬티만 입고 인터뷰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지하철이 아닌 구름 위에 오른 듯 들떠있었고 지친 일상에 활력소를 얻은 것처럼 몹시 보람찬 얼굴이었다.
이상한 나라 영국에서는 이상한 일도 이상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그저 다름으로 바라볼 뿐, 나와 달라도 존중하는 편이다. 나도 그런 눈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모든 걸 항상 분별하고 평가하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 계기중 하나가 된 영국의 발칙한 ‘벗기‘ 챌린지였다.
자유인들이 나체로 샤워하던 충격의 분수대 Victorian fountain in Old Steine, Brighton
https://sbpc.regencysociety.org/the-victoria-fountain-brighton-erected-may-26th-1846/
차마 나체인파를 그릴 순 없어 브라이튼의 평범한 자전거 가게를 펜으로 먼저 드로잉 하고 수채물감으로 채색했다. 자전거 가게 왼쪽에 잔뜩 놓여있던 자전거는 생략했다(게으른 그림쟁이입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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