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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엄마 Aug 15. 2021

시골, 밤, 잠, 책 그리고

  시골집에서 잔다는 것에, 엄마 아빠가 평소처럼 자라고 하지 않음에 잔뜩 신이 난 아들로 12시 직전에야 잠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새벽 3시 30분이 될 때까지 여섯 번쯤 깼을까. 겨울이불을 덮고 자는 나와는 달리 아들은 8월 중순 시골의 찬 공기도 덥다며 깬다. 열어둔 창으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고 칼칼해지는 목에 견디다 못해 일어났다. 찬 기를 찾아 가장자리로 온 아들을 가운데로 옮겼다. 짧은 시간 여러 번 깨는 건 역시나 등의 결림 때문인 것 같다. 살금살금 일어나 조심스럽게 이불장이 있는 방의 불을 켰다. 깔끔하게 정리해 두신 어머님의 이불장 속에서 꺼내고 싶은 이불은 높고 무거워 혼자서 꺼내질 못하겠고, 얇은 이불은 상황을 바꾸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성싶었다. 아직은 빛이 불편해 잔뜩 찌푸린 얼굴로 시어머님이 똑같은 걸 사주신, 아이의 삼촌이 미국으로 가면서 다시 시댁으로 오게 된 두껍고 무거운 겨울 담요를 꺼내어 내 자리에 위에 더 깔았다.

  그리고 누워도 잠이 오지 않기는 매한가지. 이런 날이면 엄마가 어릴 때 사주셨던 디즈니 명작동화가 생각난다. 미키 왕자는 성에서 묶고 가길 청하는 미니 공주가 진짜 공주인지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콩 한 알을 깔고는 그 위에 매트리스를 깔고, 깔고, 깔고, 또 깔았다. 일곱 번은 넘게 깔린 매트리스 위에 '과연 공주가 어떻게 올라가서 잘까?' 가 궁금할 만큼 높다랗게 표현되었던 그림이 아직도 생각난다. 다음 날 아침 미키 왕자는 식사를 하러 들어오는 미니 공주에게 “잘 주무셨냐”라고 묻는다. 그러자 미니 공주는 바닥이 불편해 잘 자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미키 왕자는 그대가 진정한 공주인지를 알아보려고 했다며 청혼을 하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로 끝이 났다. 그 책을 읽을 때가 일곱 살, 여덟 살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그 어린 나이에도 나는 뭘 그렇게 예의 차리고 살았던지 책장을 덮으며 몹시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잘 잤냐?”는 질문에 “잘 자지 못했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면 공주는 공주가 아닌 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시간이 더 지나 비판적으로 만사를 보던 십 대 후반에는 가끔 이 이야기가 생각날 때면 공주를 찾는 왕자가 격에 맞는 결혼을 하려는 세속적인 인물로 보여 못마땅하기도 했다. 결혼 후 오랫동안은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에 질색했다. 오래오래 행복한 게 어디 있어. 그랬거나 어쨌거나 삼십 년이 넘는 시간, 공주가 바닥이 불편해 잠을 자지 못했다는 건 나에게 묘한 위로를 주었다. ‘공주’인 것에 하룻밤 재워주고는 바로 다음 날 결혼하는 왕자의 태도는 못마땅했지만 잠 못 드는 나도, 예민한 나도 어쩌면 ‘공주’ 일지도 모른다는 내 나름의 위안이었다.

   멀리서 고라니가 운다. “허으윽” “허으윽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허윽거리길  ,  ,  ,   그리고도  번이 넘도록. 허윽거리며 멀어진다.   십칠 . 세시 삼십 분은 잠자는 시간을 뺏긴 기분이라면   십칠 분은 남들보다 조금 빨리 하루를 시작하기에 덤으로 얻은 행복한 시간이다. 일어나서 며칠 전부터 쓰려고 했던 글을 써볼까 싶어 비어있는 시어머니 방으로 가서 불을 켰다. 창문을 여니 방충망 달이 보인다. 차가운 공기, 풀벌레 소리, . 그리고  마음속 오래된 동화.

  정체를 알 수 없는 벅참을 느끼고 있을 때 남편은 일어나 화장실을 갔다. 가운데 옮겨줬더니 자기 전까지는 자기 아빠더러 “어허~ 선 넘네?” 하며 몸에 손도 못 대게 하던 아들은 푹신한 아빠품에 안겨서 자다가 나를 찾는 남편의 목소리에 벌떡 일어나서는 불빛이 있는 곳을 와 내 옆에 눕는다. 가서 자라고 해도 요지부동. 30킬로가 다 되어 가는 녀석을 공주님 안기로 안아 들고 내가 누워있던 자리에 데리고 가 눕혔다. 나랑 같이 눕고 싶어 끌어당기는 것을 “30분만 누워있다가 잠이 안 오면 엄마한테 와.” 하니 순순히 팔을 놓아준다.

  콩 한 알에 잠을 못 잔 공주의 이야기는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무엇을 대입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어쩜 상대가 ‘공주’이기만 하다면 괜찮았던 왕자는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순진하거나 신분에 대한 믿음이 확실했던 것은 아닐까. 당황스럽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했던 공주의 “잘 못 잤다.”는 굳이 자신을 숨길 필요는 없다는 뜻인 걸까? 평면적인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보자고 하니 정말 많은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불편한 잠자리에 결국은 자지 못하고 일어나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나를 보며 행복은 그 자체가 아니라 엮음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등과 허리는 아프고 머리는 멍하고 깨질 듯한 것과 별개로 달을 볼 수 있는 것, 고라니 소리에 웃을 수 있는 것, 어린 시절의 동화를 떠 올릴 수 있는 것, 내게 그 동화를 선물로 준 엄마, 밤, 내일은 뭘 할까 하는 기대와 설렘, 남편의 휴가로 하룻밤은 이곳을 더 즐길 수 있다는 것, 요즘 읽고 있는 청소년 문학들, 4학년이어도 여전히 엄마를 찾아주는 아이의 억센 뼈와 말랑한 살.

  어디선가 나무 태우는 냄새가 난다. 시어머니 말씀으로는 뒷 집에서 새로 사 넣은 닭이 시도 때도 없이 운다고 하던데 새벽 다섯 시 구분이 되자 연이은 “꼬꼬댁”을 외친다. 내일은 몇 시에 알림을 할지 기대가 된다.

오늘도 “공주는 잠 못 이루고”였다. 그래도, 그래도 좋은 날. 이것이 여름휴가가 가진 힘이겠지. 시골, 밤, 잠, 책 그리고 휴가.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단어들로 오늘을 채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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