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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엄마 May 16. 2024

슬픈

  구의 정신건강복지센터에 상담을 신청해 뒀다. 지난 4월 26일은 상담의 첫날이었다. 

내 속에서 마치 또 다른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는 우울을 느낀 것은 산후조리 때였다. 그전에도 내가 우울감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사건에 사건이 더해지던 그때는 어디 하나 둘러봐도 빛 한 줌 없는 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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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것도 변명이다. 구차한 변명, 내 행동에 서사를 부여하려는, 동정받으려는 변명.


 아이의 소아정신과 방문을 앞두고 있다. 초등 1, 4학년, 중학교 1학년에 검사한다는 정서행동검사에서 위험군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지난 연말 좀 힘든 시간을 보냈기에 살짝 수치가 높게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학교 위클래스 선생님께 정해진 구 청소년 상담센터로 가서 필수로 상담을 해야 한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에는 대체 휴가를 쓴 남편과 밖에서 늦은 점심을 먹으려고 하던 참이었다. 길고 긴 통화가 끝이 났고, 음식도, 남편과 오랜만에 같이 둘이 점심 먹으며 막연히 우리 가족은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분위기도 차갑게 식어있었다. 


 내 탓 같아. 애가 그러는 게 다 내 잘못인 거 같아.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며 목구멍까지 가득 찬 한숨에 겨우 말을 고르며 뱉은 첫 말이었다. 내 탓이다. 남들에게는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남편만 아는 우리 집만의 처참한 모습들이 있다. 아이를 가르친다고 한 게 결국은 분풀이가 되어버렸던 나의 모자라고 모자란 모습이 있다. 단 한 번의 실수가 아니라서 떠올릴 때마다 비참한, 아이가 기억할까 봐 무서운 과거들이 있다. 내 미숙함이, 내 어리석음이, 나의 형편없음이 아이를 그렇게 만들었다.  13살의 아이가 대인관계를 힘들어하고, 죽고 싶어 하게 만들었다. 내가, 내가 저질러 놓은 일이었다. 단 한순간도 아이를 포기하려고 한 적이 없었다. 진심으로 아이를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다. 잘하려고 애쓴 것들이 되려 독이 되었다.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진심으로 알 수 없었다.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이야기든 나누는, 고민과 내 생각에 대해서는 혈육들과는 다르게 나를 비난하지 않는 지인들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지인들의 자녀가 소아정신과를 다니고, 약을 먹고 있다고 해도, 힘들어하는 아이들이 많은 요즘이라고 해도 어떠한 것으로도 나를 위로할 수 없었다. 아니 나를 위로하고 싶지 않았다. 나 자신이 괴물 같았다. 아이의 마음이 저렇게나 힘든데 나는 살자고 지인들의 위로를 받을 시도를 한다는 것? 그 자체가 용납이 되지 않았다. 나는 나를 파괴하고 싶었다. 


 후회되고, 아이에게 미안하고, 내가 원망스럽고, 그 상황 속의 모든 것에 원인을 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이라고 해서 일상 속의 아이와의 마찰이 갑자기 다 수용이 되거나 포용이 되진 않았다. 당장 나를 끝장내 버릴 수 없다면 살아내야 했다. 살아내면서 이 순간이 나중에 또 이런 아픔이 되지 않게 신중하게 발을 내디뎌야 했다. 그러던 중 일, 이 주 전 구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전화를 받았던 것이 생각이 났다. 커피 쿠폰을 준다고 해서 별생각 없이 해봤던 간이 척도에서 점수가 높은 것이 있다며 상담을 권했던 전화였다. 당시 당장은 상담을 받을 생각이 없었고, 나 혼자서 잘 조절하며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필요하면 연락드리겠다고 끊었었다. 그곳으로 전화를 했다. 상담을 원한다고 하자, 동에 따라 나뉘어 있는 상담자 배정을 해줬고, 시간을 조율했고, 그리고 당일이 되어 센터를 방문했다. 


 짐작했던 절차, 예상했던 질문이 이어졌다. 애써 참으려 했지만 아이와 관련된 이야기에서는 울기도 했다. 생각해 왔던 질문이라 크게 어렵지 않게 대답했다. 그리고 상담자는 내게 질문했다. 무엇을 원하냐고, 이 상담의 시간을 통해서 내가 얻고 싶은 것은 뭐냐고. 글쎄요. 그걸 알 수가 없네요. 사실 미리 생각해 봤던 질문인데요. 제가 그걸 모르겠어요. 내 대답이었다. 상담자는 같은 질문을 하고 잠시 기다렸다. 그때 입이 뇌를 거치지 않은 것 같은 말을 했다. 제가 괴롭지 않고 편해졌으면 좋겠어요. (침묵) 저를 용서하고 싶어요. 

나는 나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내가 했던 모든 행위를 내가 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런 내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미웠다.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것도 나였다. 

적절하지 않은 훈육을 한 것도 나였고, 더 나은 엄마의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것도 나였다. 내가 저질러 놓은 일에 내가 무서워 우는 꼴이었지만 그것조차도 나였다. 받아들여야 하는 나의 부족함이었다. 알면서도 용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아이에게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 자신이 나를 용서하는 것은 자기 연민이고 싸구려 동정이며, 위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명확한 진실 중 첫 번째는 나는 최선을 다했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내가 나를 용서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더 할 수 없이 나를 몰아붙이고 비난했다. 내겐 너무나 쉬운 방법이다. 내 탓을 하는 것. 이제는 나를 용서해야 한다. 나를 용서하고 싶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하는 날들을 좀 더 나은 장면들로 채워가고 싶다. 


 첫 상담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내 마음을 알게 되어 통쾌하면서도 슬펐다. 좀 많이. 나는 이렇게나 나를 미워하며, 몰아세워가며 그렇게 살아왔구나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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