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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원 Feb 02. 2023

따뜻한 하루

엄마와 함께

아침 일찍 서둘러 아이를 등원시키고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집 앞에서 전화할 테니 내려오지 말고 집에서 기다리라고.   

  

서둘러 엄마집 앞에 도착해 전화를 하니 빨래를 널고 있다고 한다. 

살짝 어이가 없는 상황이다. 예약이 시간이 빠듯한데 빨래를 널고 있다니.


분명, 엄마는 오늘 집에 들어오지 않을 거라 생각을 한 것이다.

절대 진료를 받는 날은 바로 입원하는 일이 없다고 그렇게 설명을 했는데도 말이다.     

몇 분 뒤 엄마는 내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예상대로 짐도 다 챙겨놓았다고 한다.


밤새 걱정을 하며 냉장고 정리에, 입원했을 때 필요한 물건까지 다 챙겨 놓았던 것이다.     

걱정이 많아도 너무 많은 우리 엄마.  

   

10시 20분 병원에 도착했다.

예약을 해둔 덕에 우리는 바로 들어갈 수 있었고, 산부인과라 그런지 사람도 거의 없었다.     

엄마는 차근차근 증상을 설명하고, 아주 오래전에 물혹 제거 수술을 했었다는 것도 얘기했다.

의사 선생님은 초음파와 자궁경부암검사까지 해보자고 했다.

나는 할 수 있는 검사는 다 해달라고 했다.


엄마는 긴장된 얼굴로 초음파실로 들어갔다.     

보호자인 나는 진료실 밖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보호자분 들어오세요”

이쁜 간호사가 나를 불렀다.


의사 선생님은 초음파로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자궁경부암 검사는 건강검진에 해당되는 것이니 서류작성해서 접수하면 무료로 할 수 있다고 했다.

건강검진센터로 가서 이런저런 서류 작성하고 담당 의사와 상담도 하고 접수 바코드를 다시 산부인과 진료실에 제출하고 왔다 갔다 몇 번을 했다.     

이런 복잡한 걸 어르신들이 혼자서 한다는 생각을 하니 절대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젊은 나에게도 복잡한 종합병원 업무는 노인들에게는 너무나 힘들 일이라 생각한다.

보호자가 없는 어르신들도 간편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시스템으로 발전하기를 바래보며 나는 엄마와 함께 병원을 나섰다.     


2주 후의 자궁경부암 결과가 이상 없다고 날아오면 그 후에 무릎에 대한 진료를 받아보자고 계획을 세우며 우리는 언니네 집으로 향했다.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기 위해서이다.


엄마는 대구볼찜, 아귀찜 같은 매운 찜 종류를 좋아하고, 언니는 매번 새로운 곳을 가기를 희망한다.

엄마가 오늘은 언니가 먹고 싶은 걸로 먹자고 양보를 했다.


언니네 동네 가까운 곳에 유명한 스파게티 집이 있다. 그곳으로 정했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는데 왠지 엄마에게 별로일 것 같아 나는 말했다.


“드라이브할 겸 신광 쪽으로 가서 소고기 먹고 바닷가로 드라이브할래요?”     

모두 찬성이었다.


밥값은 두 배 넘게 나오겠지만 모두가 즐거운 점심을 먹기로 했다.     

신광에 있는 소고기집은 언제나 손님들이 넘친다. 오늘도 그랬다.

셋이서 소고기를 넉넉히 먹고, 된장찌개와 밥을 먹었다.

보통 때라면 거뜬할 양인데도 오늘은 셋이서 고기를 남겼다.

이게 무슨 일인지.     


남은 고기를 포장하고 우리는 밖으로 나와 월포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이곳과 가장 가까운 바닷가다.    

 

바다가 파도 한점 없이 잔잔하다.

햇살이 따사롭다.

엄마가 걱정했던 수술을 하지 않아도 된다.

아. 너무나 평화로운 날이다.   

  

바닷가에서 잠시 쉬며 화장실을 이용하고 나와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가끔 이용하는 해안도로에 있는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그곳에서 개와 고양이 커플을 만났다.

참으로 다정한 그 커플은 눈을 껌뻑이며 졸리는지 따사로운 햇살을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엄마에게 아주 옛날에 살던 동네를 보여주고 싶었다.

외할머니께서 살던 집. 그리고 맞은편 우리가 살던 집.

두 곳 다 집은 없고 터만 남아있었다.


어릴 적 그곳은 참으로 넓은 곳이었는데, 지금 그곳은 무척이나 좁은 땅덩어리에 불과했다. 정말 신기할 정도로 작았다.


그곳에서 우리 여섯 식구는 한방에서 알콩달콩 지냈다.

워낙 어릴 적이라 기억은 많지 않지만 마당에 배나무, 감나무가 있었고 조그만 토끼장과 닭장도 있었다.


그때 길고양이를 안아주고 놀다가 피부병이 옮아 고생했던 것도 기억이 난다.     

아빠는 오토바이를 탔었고, 우리 식구를 나눠서 태워 나르던 기억도 난다.


그땐 그랬었는데. 아. 그게 벌써 40년이 다 되어간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돈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 집터를 사고 싶지만, 슬프게도 돈이 없다.     


지금은 평당 100만 원이나 하는 동네가 되었다.

아직도 별거 없는 시골 동네지만 예술촌이 들어섰고, 나름 운치 있는 동네가 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뭐 하고 살았는지. 난 왜 돈이 없이 이런 것도 척척 못 사는 걸까.

하지만 몇 년 안에 이 동네 양지바른 좋은 터를 꼭 사겠다는 목표를 세워본다. 

    

많이 변해있는 동네를 보며 엄마는 어리둥절해했다.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금세 여기는 누구네 집이고, 저기는 또 누구 집이고... 모두 기억해 냈다.     


우리 세 사람은 한참을 추억에 잠겨 동네 구경을 실컷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종일 마음이 따뜻한 하루였다.


움직이지 정말 잘했다. 참으로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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