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 말이 결코 내가 쿨하다거나 아프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인생에서 '이 아이'만큼은 내 곁에
남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친구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열어놓고
한참을 고민하고 있다.
손가락을 따라 마우스 포인터가
'친구 끊기' 버튼 위로 올라갔다가
잠시 옆으로 빗겨섰다가하는 행동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다.
우리 둘은 지금 그런 관계다.
알 수 없는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지만
'쿨한 척'하는 그런 관계.
친구에게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물어봐도 답이 올리가 없기에
내 입장에서 주관적, 혹은 약간은
객관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그런 것 같다.
둘 중에 한 명이 그 끈을 놓아주어야 하지만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지를 못한다.
둘 중 누구에게라도 서로가 소중하지 않은
인연은 아니라는 뜻이겠지.
제삼자로 인해서 멀어져 버린 관계는 당사자들끼리의 충분한 대화의 의지만 있다면
금방 예전처럼 회복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는데 요즘은 혹시 내가 제삼자는 아니었던 건가 싶다.
서로의 생일에 매일 첫 번째로
축하를 해주겠다며 아웅다웅하던 우리가
지금은 그 흔한 생일 메시지 하나도
보내지 않는 관계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 작은 버튼 하나를 누르는데도
오만가지 생각이 오고 가다 보니
문득 나 자신이 그 버튼보다 허술한 존재는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아마 그 버튼을 사이에 두고 나와 내 친구는
같은 고민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싶다.
아니, 그랬으면 한다.
성인이 되어 인간'관계'를 하다 보니 사람
사귀는 것이 일이라는 말이 사실이구나 싶다.
그 흔한 '인간관계의 처세술, 올바른 인간관계를 하는 방법'등의 책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현대인들은 자기 자신의 생각으로 상황을
결정하지 않고 다수의 생각대로 흔들리며 사는
'갈대병'을 앓고 있는 것 같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사정없이 흔들리는 나 자신이 보기가
싫어 SNS를 끊다시피 하며 살아가고 있다.
(뭐, SNS를 거의 끊고 난 후 정신 건강이 더욱 차분해지고 안정적이 된 것을 보면 내 개인적인
프로젝트가 약 11% 정도의 부수적인 가치생산 수단으로써 나름의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그리고 신념이 곧은 대나무 인척 한다.
사실은 작은 바람에도 휘청거릴 갈대면서.
그러면서 자신이 입버릇처럼 앞에
내세우는 '시대'를 비난한다.
"요즘 세상에는 말이야!
도대체 제대로 된 인간들이 없어."
그 말을 힘주어 외치는 자신의 내적인 위태로움 위로 '대세론'이라는 색깔 테이프를 덧발라
자신이 말하려는 말의 본질을 금세 숨기고 감춰버리고 누군가 자신의 의견을 물어왔을 때는
덧발라진 테이프의 색깔을 소개하면서 마치
자신의 생각을 대변하는 듯 흡족해한다.
마치 '시대가 그러하니, 나의 생각이
이런 색깔인 것은 어쩔 수 없어'라는 듯이.
하지만 한 시대가 지나가 버리고 나면
"나는 사실 A를 말하려고 했는데 사람들이
B라고 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어"라고
금세 태도를 전환한다.
현대인의 인간관계에도 이런 '때'가 묻기 시작했다.
빡 빡 밀어내서 흐르는 물에
씻어버리지 않으면 사라지지 않을 그런 '때'
그리고 나 역시 이 못된 '때'때문에
친구 삭제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먼저 메시지를 보내도 시큰둥한 대답을 해오는 친구의 반응을 보며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건가?"라며 스스로에게 열심히 자문자답을 하고 있다.
친구에게 묻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물어도 코웃음과 함께 "아니, 별일 없는데?"라는
대답을 해올 친구의 날 선 반응이 두려워서다.
우리 사이에 '악의적인 자존심'이 생겼고
그토록 사랑하는 친구에게
자꾸만 반복적인 '치졸한 거절'을
당하는 것 같아 두려워
한겨울의 벌거숭이처럼
덜덜 떨고만 있는 것이다.
대화로 풀면 많은 이야기들에는
인과관계가 있음을 찾을 수 있고
그 관계들은 허무하게도 한순간에
풀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
우리 중 아무도 '묻거나', 혹은
'끊거나' 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친구도 나만큼 고민하고 있을까?"라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불만이 있으면 직접적으로 대놓고 얘기해서
대화를 통해 풀어야 하는 나는 지금 이 상황이 '누구 하나 나쁜 년, 나쁜 놈 되기는 싫어
질질 끄는 비겁한 연애'처럼 느껴져서
속이 타들어간다.
수면 위로는 평온하게 유영하고 있지만
수면 아래로는 셀 수도 없는 허우적거림이
오고 가는 그런 '백조'처럼 말이다.
내가 저 '친구 끊기' 버튼을 누르면 친구는
아파할까, 당황할까, 아니면 아무렇지 않을까.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아무렇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단순히 끊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
뿐이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이 비겁한 관계를 내가 먼저 끝내도
나도 죄책감이 들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비난받지 않아도 될 일'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을 것 같다.
친구도 나도 이렇게 너무 찌질하고 비겁해서
코웃음이 쳐질 만큼 구질구질한 관계를
연명하고 있다.
어쩌면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이도 저도 아닌' 그런 관계에
곁눈질하며 매달리고 있겠지.
하지만 누군가의 '아쉬움'이 아니라
'진실된 존재'로 남고 싶은
인간의 시시한 작은 욕구가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작은 '아쉬움'이라도 곁에 두고 싶은
누군가의 찌질한 '욕심'도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솔직하지 못할 뿐.
그저 때가 묻은 것뿐.
그리고 그들 자신만의
'삶을 살아내는 방식'일뿐.
인간관계에 연연하고 상처받는
못난 인간이 되기 싫어서 SNS를 끊기 시작했는데
어쩌면 결국 내가 끊을 수 없었던 그 모든 것들은 비단 SNS뿐만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내가 SNS를 끊고 싶었던 이유가 내가 SNS에서 친구 삭제를 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와 같다면,
나는 스스로가 얼마나 구질구질하고 찌질한 인간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두 가지 경우의 대상이 동일하다면 나는 반드시 '친구 삭제' 버튼을 눌러야겠지.
왠지 A가 B일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다.
수면 아래에서 빠르게 버둥거리던 내 마음의 방향들이 더욱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왕 가벼워지기로 결심한 거
잃을 때 아픈 것보다 아파서 잃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이 고민은 결코
'아프지 않아서 쉽다'고 얘기 할 수 없다.
다만, '아픔이 지나쳐 이별이 빨라졌다'고
이야기 할 수 있게 됐을 뿐.
뜻모를 이별 통보에 아프지않은 사람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