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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훈 Mar 21. 2023

나 어릴 적에

리더십은 언제부터 형성될까?


 우리는 늘 리더십의 중요성에 대해 듣는다. 리더십을 갖춰라고 한다. 리더십이 무엇일까? 그것은 훈련에 의해 갖출 수 있는 것일까?

사전적 의미로 리더십이란 '조직체를 이끌어 나가는 지도자의 역량. 단체의 지도자로서 그 단체가 지니고 있는 힘을 맘껏 발휘하고 구성원의 화합과 단결을 이끌어낼 수 있는 지도자의 자질을 말한다.'라고 되어 있다.
한마디로 어떤 조직이나 무리를 통솔하는 능력이다.
전문적인 학문으로서의 접근은 여기서 하지 않겠다.
수십 년간 아이들을 가르치는 현장에서 여러 또래집단을 접하였다. 그리고 나 스스로의 어린 시절과 내 자식들의 또래집단에서의 위치와 성향을 살펴볼 기회가 많았다.



1]
나는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이후부터는 초등으로 하겠다) 저학년까지는 또래 중에서 크게 부각되지 않은 듯하다. 세 번의 전학으로 학교에서 잘 적응을 못했던 듯하다. 그리고 이사도 잦아 동네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남자 형제가 없는 위로 누나 넷과 아래로 여동생 둘을 둔 여자 틈에 끼인 존재였다.
아마도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조금씩 변했던 듯하다.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갔는데 처음엔 동네 친구들이랑 어울리지를 못했다. 안 놀아줬다. 좀 이상한 동네였다. 그런데 어느날 그 동네 큰애들이 5학년 짱을 뽑아야 된다며 동네 뒷산으로 데려가 어떤 녀석이랑 싸움을 붙였다. 빙 둘러 선 애들은 당연히 모두가 자기네 동네 아이를 응원했다. 치고받고 뒹굴고 엎치락뒤치락 싸움 끝에 내가 이겼다고 결정이 났다. 그 동네 5학년 짱이 되었다. 그런데 사사건건 이것들이 지네 형을 앞세워 나를 압박했다. 또래집단에서 상급생은 아무리 약해도 형 대접을 해야 했다. 그것도 잠시,  2학기 말에 또 이사를 했다.
전학 수속이 안되었는지 두어 달 버스로 통학을 했다.
2학년 동생과 함께였다. 그 당시는 콩나물시루 버스였다.
입구를 꽉 막은 어른들이 당채 길을 터주지 않았다.

"내려요~~~ 쫌 비켜주이소~~"

꿈쩍을 안 했다. 할 수 없이 극단적 방법을 썼다. 이름표에 달린 핀을 뽑아 마구 찔렸다. 누가 뒤통수를 때렸다. 그래도 무사히 빠져나왔다. 여동생도 울지 않았다. 그 녀석은 내가 큰 애들에게 맞고 있으면 달려와

"니 우리 오빠야 한테 와 그라는데"

위고 뭐고 없었다. 남자 세계랑 달랐다. 나의 제일 큰 우군이었다^^~♡

지금 사과한다. 그때 옷핀에 찔리신 어르신들...
용서하십시오.

각설하고... 그러다 방학을 한 한 달 남겨두고 전학을 했다. 학교에는 또 친구가 없었다. 그러다 곧 방학을 하고 동네 애들끼리 친해져 놀았다. 대여섯 명이 몰려다니며 어둠이 깔려도 놀았다. 동네에 하야리아 부대가 있어서 미군차량을 따라 달리며 "헬로~ 기부미 껌. 기부미 초꼴렛"을 외쳤다. 그러면 군인들이 껌이랑 초콜릿을 던져 주었다.  "땡큐~~~ 씨유. 사요나라~~~"

어떤 땐 안 주고 그냥 가면 팔로 빡큐를 날리며 "빡큐. 빡"을 외쳤다. 그러면 차가 멈추고 양키 병사들이 달려왔다. 우리는 냅다 도망쳤다. 뭐 빠지게 뛰었다. 아... 씨바 그때 신발은 왜 또 그리 잘 벗겨졌는지.

 내 영어회화 실력은 그때가 최고 유창했다. 아버지가 미군인 준이(나중에 보니 Jhon이었다)가 옆집에 살았는데 한국말과 영어를 같이 써서 자주 어울렸다. '아이노쿠'라고 애들이 많이 놀렸는데 내가 많이 놀아줬다. 걔네  집엔 장난감도 많고 마당엔 자전거도 있었다. 준이네 집 담에 구멍을 뚫고 올라가 하야리아 부대로 잠입해 장난감 같은걸 훔치다 혼나기도 했다. 이튿날 군인들이 와서 시멘트로 구멍을 막고 가면 우리는 또 뚫었다. 그러다 준이는 미국으로 갔다. 몇 번의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내가 이사를 가고 중학생이 되면서 연락이 끊겼다. 보고 싶다. 여동생 크리스틴(? 그냥 내 기억임)도


2]
 또래집단은 자연히 하나의 리더를 구심점으로 움직인다. 그 동네 짱은 내가 되었다. 또 이사를 갔다. 아버지한테 통사정을 해 전학을 안 하겠다고 하고 동래에서 서면까지 통학을 했다. 어머니가 서면 뒷골목에서 포장마차를 하셨기 때문에 학교를 마치면 뒷정리를 하고 같이 귀가를 하는 날도 많았다. 그때 포장마차에 삐끼나 기도를 서던 건달들이 많이 왔었는데 그때 '돌콩'이라 불리던 형이 나를 지 밑에 오라면서 싸움 동작 같은걸 가르쳐줬는데 우리 어머니한테 혼이 났다.

"너거들 우리 아한테 찝짝거리지 마라. 깡패 시키 끼가, 그라모 너거들 이제 오지 마라."

그때 거기 옆에 권투도장이 있었다. 내가 늘 가서 밖에서 구경하고 있으니까 어느날 관장님이 들어오라고 했다. 스텝과 손뻗는 기술등 간단한 걸 가르쳐 주셨다. 줄넘기도 하고 잽잽이랑 새도우 스텝(?) 같은 거 하고 원투 원투 잽잽도 하고 샌드백도 치고 놀았다. 그러다 또 어머니가 쌈 하는 거 배우지 말라고 하시는 바람에 그만 뒀다. 그리곤 얼씬도 안 했다.

 다행이었을까? 이사 간 동네에 먼저 있던 동네의 친구가 이사를 와 합류하면서 또 그 동네 짱이 되었다.
아이들은 나를 '본관'이라고 불렀다. 내가 아이들을 모아 놓고 대문 위에 올라가(당시 대문 위가 평평하게 되어 있었다) 연설을 할 때

 '본관이~~~ 어쩌고 저쩌고. 그래서 본관이~~"

라고 해서 그랬던 것 같다. 윗동네 애들이랑 패싸움도 하고...(조폭 상상을 하지 마시라. 그냥 꼬맹이들의 전쟁놀이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중학생이 되면서 조직을 부관에게 물러주었다. 뭔 일이 있으면 또 초딩짱인 부관이 "본관~~~"하고 도움을 청했지만 "이제 나는 상관 안 할 거니까 너거들끼리 해결해라"하고 관여를 안 했다.
중학교 때 늘 함께 몰려다니던 친구가 둘 있었다. 그런데 그 둘이 나 몰래 태권도와 쿵후도장을 다니고 있었다. 태권도장에 다니는 녀석은 나보다 키가 한 5~7센티 크고 쿵후 하는 녀석은 나보다 훨씬 작았다.



3]
태권도하는 녀석이 어느 날 쿵후 하는 녀석과 나를 어디로 유인을 해갔다. 가보니 자기가 다니는 도장이었다. 한판 붙자는 거였다. 그 녀석이 얼마 전 태권도 초단을 땄나 보았다. 몇 분만에 그가 항복을 했다. 나는 태권도는 중3 때 당시 학교 체육선생님이 친구가 하는 도장에 나를 보내서 한 두어 달 다닌 게 다였다.
그때는 아이들끼리 '까기'라는 놀이를 했다. 편을 나눠서 치고받고 차고 하면서 싸우는 거였다. 그냥 반은 장난이었는데 그러다 진짜 싸움되기도 했다. 그걸 보던 체육선생님이 불렀다.

"야, 너 태권도장에 다니나?"
"안 다닙니더"
"너 내 친구 태권도장에 다녀라"
"도장 다닐 돈 없는데예"
"마, 누가 돈 내라 카더나. 니 오늘 수업 마치고 어디로 와"

갔더니 도복을 입고 있는 우리 학교 애들이 몇 보였다. 우리 반 애들도 있었다.
다짜고짜 애들이 쭈욱 벽 쪽으로 가 앉고 대련이 시작되었다. 나하고 차례대로 한 녀석씩 붙였다. 나는 그때까지  태권도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본건 그냥 당시 영화 속의 이소룡 흉내나 내는 거였다. 혼자서 정권 단련도 하고 돌도 깨고 벽돌도 깨고 기왓장도 깨고... 철사장이라고 모래를 뜨겁게 달궈서 손을 집어넣기도 했다.ㅋㅋ  미친 지랄을 했다.
어쨌거나 하나씩 차례대로 붙이고는 마지막으로 어떤 여학생을 불렀다.

"아~ 싫은데예. 여자를 우찌 때립니꺼. 맞으면 죽을 수도 있는데예"

체육선생님이랑 관장님이 막 웃었다.

"마, 잔소리 말고 함 해봐라"

처음엔 살살해줬는데 이건 뭔가 지금껏과 달랐다. 내가 몇 대 맞았다. 열이 슬슬 났다. 부아가 치민다. 이소룡처럼...
지금도 동네 동생들 중에 술집 하는 녀석은 "소룡이 형님 오십니까?" 한다.

"샘예, 진짜로 차고 때리도 됩니꺼?"
"으어. 니  맘대로 해봐라"

진검승부다. 정신을 가다듬었다. 얕볼 수가 없는 상대라는 게 느껴졌다. 내가 몇 번을 몰아치고 관장님이 그쳐를 몇 번 하다가 마지막엔 돌려차기에 내가 목을 맞았다. 불이 번쩍 들어왔다. 애들이 박수를 친다. 그 여자애가 저거 편이고 나는 혼자였다.ㅠ 관장님이 그쳐를 했다. 졸도는 안 했다. 쪽 팔렸다. 근데 알고보니 그 누나가 검은띠 3단 고2 랬다. 

 그날 도장을 나오니 벌써 날이 어두운 밤이었다. 한참을 걸어갔는데 길이 이상했다. 반대로 가고 있었다. 서면로터리 쪽으로 가야 하는데 범냇골 쪽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정신이 없는 거였다. 밤이기도 했지만...
며칠을 친구들이 부르면 목을 못 돌려 몸 전체를 돌려야 했다. 이것들이 일부러 자꾸 부른 것이다. 망할 노무 새끼들...
체육선생님 덕에 몇 달을 공짜로 다니다가 어머니에게 들켰다.

"댕기지 마라. 사람 패는 거 배워서 머하끼고. 깡패 할 끼가? 공부나 해라. 으이"

 태권도는 그래서 그만둔 게 다였다.



4]

그런데 이 친구가 초단 땄다고 나랑 맞짱을 신청한 것이다. 그날 뒤로 또 아무 일 없듯이 잘 지냈다. 고등학생이 되었다. 나는 우여곡절 끝에 인문계로 가고 그 친구는 유명한 송도상고를 갔다. 고2가 되어서 또 붙자고 했다. 그 친구는 키가 더 커  있었다. 나는 173인데 그 친구는 나보다 10센티 정도는 더 컸다.
태권도 2단을 땄단다. 초반엔 내가 밀렸다. 발차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큰 키와 긴 다리에서 붕붕 휙휙 바람을 갈랐다. 나르기도 했다. 근데 싸움은 태권도랑 다르다. 나야 태권도를 잘 모르지만 패턴이 읽혔다. 몰아붙였더니 몇 대 맞고 항복을 했다. 그날 내가 정색을 하고

 '이 다음부터는 다시 붙자고 하면 진짜 죽는다'

하고 으름장을 놓았는데 그 친구도 그 이후로는 다시 붙자는 말이 없었다. 나는 대학생이 되고 그 친구는 형을 도와 정육점 일을 했다. 성인이 되고는 힘자랑은 끝이 났다. 아마 그때는 그 친구도  무도인이 되었으니 그런 마음이 없었겠지만 아마 붙었으면 내가 깨졌을 거다. 그 친구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그 후 그도 나도 서른이 되어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었는데 뭔가를 계기로 그 친구가 연락을 끊었다.
아마도 오해였겠지만 못내 안타깝다. 초딩동창 중딩동창과 동네 연락망을 통해서도 소식을 못 듣고 있다.

보고 싶다. 친구야

오해가 있었을 거다. 오해가 맞다. 혹시 네 맘을 상하게 했다면 모든 걸 용서해라. 용서하고 연락해라. 이제 우리 환갑 진갑 지난 노땅 아이가??



5]

리더십... 선천적으로 갖춰지는 것도 있고 또 학습에 의해 리더십을 배울 수 있다. 요즘 리더십강의가 많은 것 같다. 오픈리더십이니 서번트 리더십이니 심지어 감성리더십이란 것도 있다. 리더십을 배우는 것이다.

내 생각엔 가장 중요한 때가 어릴 때가 아닐까 한다. 그래서 초등학교부터 리더십을 키워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급 반장이나 학교 회장등을 통해 미리부터 리더십을 익혀두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제대로 된 심성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아이들이 반장 부반장 회장 부회장 선거에 나가는 것을 막을 필요는 없다. 독려하거나 강제할 필요도 없다. 그저 지켜보는 것이 낫다. 그나마 예전과 달리 요즘은 학교에서 반장 회장 부모에게 요구하는 게 없는 듯하다. 당연한 거지만 학교는 예전처럼 그래서는 안된다. 나 때는 엄마가 절대 나가지 말라고 했다. 돈이 없다는 거였다. 슬픈 일이다. 지금은 교육이 아니 학교가 많이 바뀐 것 같아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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