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외로워하지 마라
01. 우리가 살면서 겪어야 할 것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가 겪어야 할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태어남이야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가 없었을 것이다. 학교를 다니고 남자는 군대를 가고 그러한 것들이 아닌 사랑이라든가 이별이라든가 그러한 것들을 얘기하고 싶다. 사는 동안 가슴 절절한 사랑을 한 번이라도 해 본 다는 건 축복일까? 가슴 절절했던 그 사랑이 애증이 되고 내가 목숨만큼 사랑한 사람이 내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 되었을 때의 그 절망감과 처참함이 처절한 내 삶의 밑바닥에 깔려 평생을 짓누를 때 사랑이 과연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 그 순간이 아름다웠으므로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 법구경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가지지 말라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은 만나지 못해 괴롭다고 했다. 그러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였을 때의 기쁨은 어디에 갔을까? 궁극의 별리가 결국은 그것을 대변하는 것일까?
만나고 헤어지고 사랑하고 이별하는 것이 꽃이 피고 또 지는 것과 같은 것일까? 그렇다면 꽃이 지고 열리는 열매에는 그 꽃의 한이 서려 있는 것일까? 조개는 상처를 입고 진주를 만든다. 그 은은한 아름다움이 고통을 안고 만들어진 애증의 산물이라는 것이라는 것일까? 우리의 인생도 그러할까? 고난 속에서 더 빛나는 영광이 있음과 같이 인고의 넋이 고결한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일까? 처절한 울음도 신에 대한 증오의 부르짖음도 결국은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일까? 바보 같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초라하다. 왜냐하면 그 모든 걸 합리화하고 묻어버리려는 얄팍한 자위이기 때문이다.
이기려면 버려라고 했다. 알량한 내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나는 아등바등거리며 산다. 왜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이 작은 허세를 버리면 진정 크나큰 즐거움이 올까? 작은 쾌락을 버리면 커다란 즐거움이 온다고 했는데 나는 그것이 못마땅하다. 살아가는 데 있어 하루하루의 작은 즐거움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종교에서 말하는 커다란 즐거움이란 곧 깨달음이거나 해탈일 것이다. 내가 부처가 될 수 없고 예수가 될 수 없음에도 종교는 우리에게 그것을 꿈꾸게 한다. 기만이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성자가 하는 만큼의 선과 자비를 행할 수 없다. 그저 내 이웃에 친절을 베풀고 작은 도움을 주는 것이 우리의 최선의 능력이다.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지나친 욕심을 부리는 것이다. 그것은 긍휼이 아니라 응징이 되는 것이다. 그가 가진 능력 안에서 선을 행하고 봉사를 하는 것이 곧 성자의 그것과 맞먹는 것이다. 나는 가끔 신과 맞짱을 뜨고 싶을 때가 있다. 도대체 내게 왜 이러는 겁니까? 당신은 우리가 감당할 만큼의 고난을 준다면서요? 그런데 왜 내게만 유독 이렇게 감당하기 벅찬 고난을 주는 겁니까? 저어기 축복을 받아 복에 겨운 이들은 왜 그런 겁니까?
어릴 때 내가 잡아 날개를 떼고 손바닥에 올려놓고 놀던 파리는 결국 고통 속에서 죽임을 당했다. 신이 나와 같이 나를 그 파리처럼 대하고 있는 것일까? 오래전 그 파리에게 사죄한다. 나는 몰랐다. 네가 그토록 아프고 괴로웠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그냥 너랑 따분한 오후를 즐기고 있었을 뿐이었다. 지금 신 또한 언젠가 내가 죽고 나면 알게 될까? 지금 내가 아픕니다. 지금 내가 절망 속에서 울부짖고 있습니다. 이제는 놓아주고 치료해 주십시오. 떼어낸 날개는 원하지 않습니다. 그냥 이대로 땅 위에서라도 살아갈 수 있게만 해 주셔도 감사합니다.
신이 공평하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는 우리의 사주팔자라며 인정해 버림으로 잊고 있는 것이다. 그 사주팔자도 신이 내린 결과일 뿐인데도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참 나약하다. 그저 주어진 선만 따라가는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개입하고 있는 신에게 항의하기보다는 그저 잘 봐 달라고 아부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꿈쩍을 않는 신은 너무나 가혹한 것이다. 신은 자비로워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그런데 신이 주는 것은 알량한 생색에 불과하다. 다만 그가 편애하는 이들에게만 자비롭고 사랑이 있는 신일 뿐인 것이다.
인간이 신과 상대해서 이길 수는 없다는 게 정설일 것이다. 그러나,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고 신의 놀음에 그저 맡겨두고 속수무책 이어서야 되겠는가?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
신이 설사 나를 푸대접한다 하더라도 나까지 나를 그리 대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 한번 우리의 힘으로 운명을 개척해 가보자.
여기서 잠깐의 생각을 해보자. 신이 나에게 푸대접하듯이 나는 내 주위의 누군가에게 그리 하지 않았을까? 곰곰이 한 번쯤은 생각을 해보기를 권한다. 혹여 그가 내게 가장 가까이 있는 나의 배우자 이진 않을까? 요구만 하고 그의 요구는 나 몰라라 들어주지 아니했는지 말이다. 새삼 헤어지고 난 뒤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보게 된다. 있을 때 잘 해라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지나치고 나서야 진실을 본다. 왜냐하면 완전하지 못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상대가 나를 배신했을 때다. 상대가 나의 믿음을 저버렸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의 해결 방법이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언젠가 이런 기사를 보았다. 아내가 성폭행을 당했다. 남편은 그 아내를 위로하고 트라우마를 지우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며 가정을 지켜가는 내용이었다. 그때, 내게 똑같은 일이 닥친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부끄러웠다. 그 남편처럼 할 만큼의 아량이 내게는 없는 듯했기 때문이다. 하물며 나를 배신하고 다른 사람과 불륜을 저질렀다면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까? 다시 받아 줄 수 있는 아량이 내게 존재할까?
당신은 어떠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