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이 되었다. 장수는 청바지에 하얀티로 딴에는 한껏 멋을 내고 다방으로 갔다. 이번에는 30분이나 일찍 도착을 했다. 그녀가 빨리 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보다 그녀가 먼저 와 기다리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었다. 그게 그녀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다. 신사의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시간이 왜 이렇게 안가는 걸까? 장수는 문이 열릴 때마다 출입구쪽을 쳐다 봤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약속시간인 2시가 넘어 있었다. 처음엔 장수는 느긋했다. 그녀는 꼭 올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30분이 지났다. 장수는 조금씩 초조해졌다. 다방아가씨가 커피를 주문하겠냐고 물었다. 장수는 커피를 한잔 시켰다. 다방 아가씨의 시선이 "짜식 바람 맞았구만"하는 느낌이었다. 커피를 홀짝 거리면서 시계를 보니 1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때부터 장수는 다시 느긋해졌다.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녀는 온다. 분명히 온다. 아마도 무슨 피치못할 일이 생긴 걸꺼라고 생각했다.
메모지와 볼펜을 가져온 장수는 메모지에 쓱쓱 그림을 그렸다. 처음엔 꽃병과 사과가 있는 정물화를 그렸다. 중학교 미술시간 때 장수가 그린 그림을 보고 미술선생님이 미대를 가라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장수는 물감이며 스케치북이며 미술도구를 산 적이 없다. 고아원에 물감과 스케치북 그리고 붓등이 있긴 했다. 그런데 사람 수에 비해 한참 모자랐다. 그래서 장수는 다른 아이들에게 양보를 하고 학교에 와서 다른 반 친구들에게 빌렸다. 아껴쓰라는 녀석들의 성화에 물감은 조금만 쓰고 물을 많이 들어 그려 냈는데 그게 번번히 입선이니 특선이니 하며 복도 벽에 전시가 되었다. 붓의 터치가 살아있다느니 하는 미술선생님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충 그려낸 것이었기 때문이다. 장수는 그림에 몰두해 시간가는 줄도 잊고 있었다. 이번에는 여자의 얼굴을 그리고 있었다. 무의식 중에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 이거 저에요?"
깜짝 놀란 장수가 올려다 보니 땀이 송글송글한 얼굴의 그녀가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우선 물부터 한잔하라고 탁자 위에 놓인 물컵을 들어 그녀에게 건냈다. 단숨에 물잔을 비운 그녀가 말했다.
"늦어서 미안해요. 급한 일이 있었어요."
시계를 보니 4시였다. 약속시간보다 두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장수는 시간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가 온 것이다. 장수는 오늘 그녀가 꼭 올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몇시간이고 기다릴 참이었다.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근데 왜 가지 않고 여태껏 기다리신거에요?"
"오실 줄 알았거든요. 반드시 올거라고 생각했어요."
장수가 얼굴에 미소를 띄며 그녀를 보고 말했다. 그녀도 따라 미소를 지었다. 장수가 물었다.
"근데 두시간이나 지났는데 어떻게 왔어요?"
"기다릴거라고...내가 올 때까지 기다릴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꼭 기다릴거라고 생각했어요."
버스를 내려 뛰어왔다는 것이다. 정류장에서 다방까지는 꽤 먼거리였다. 그 먼거리를 달려왔을 그녀를 생각하니 장수는 그녀가 너무도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둘은 그때부터 언제 그랬냐는듯이 이야기에 빠져 들었다. 그녀와 있으면 정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녀의 입에서 끊임없는 이야기가 나왔다. 장수는 행복이란 걸 느꼈다. 신이 장수를 위해 선녀를 내려 보낸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당시는 전화가 귀했다. 장수도 전화가 없었다. 살고 있는 집 건너편에 있는 아주머니네 전화를 빌려쓰던 시절이다. 공중전화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녀도 전화가 없다고 했다. 옆집 전화가 있지만 미안해서 잘 쓰지 않는다고 했다. 그날 장수가 그녀에게 알아낸 것은 그녀가 작은 양품점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상호가 '모던 양품점'이랬다. 둘이 있으면 정말 시간이 쏜살같았다. 어느새 문을 닫는 시간이었다. 그녀가 다음 주 수요일에 만나 맛있는 걸 사주겠노라 했다. 오늘 자기가 늦게 왔는데도 기다려준 보상이랬다. 그녀와의 헤어짐은 언제나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도 다음 만남이 약속되었으니 장수는 가슴이 벅참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