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사랑에 빠진 이들이 끝없이 향유하는 시, 김춘수 ‘꽃’의 한 구절이다. 그의 이름을 부른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의 학벌, 인맥, 직업, 직종, 나이, 경제력은 아닐 것이다. 꽃을 보고 감탄하는 것은 장미라서, 수입이라서, 비싸서, 화환이라서가 아니라 향기, 색깔, 모양인 것처럼 말이다.
장미는 전 세계에 2,500여 종이 있다고 한다. 매일 지나다니는 아파트 담벼락에 빨간 장미가 피어있다. 어느 정도 폈는지, 잎이 몇 개인지, 무슨 색인지, 꽃밥은 어떻게 생겼는지, 꽃받침이 얼마나 큰지, 줄기는 어떤지 기억하지 못한다. 과연 나는 장미를 본 것일까. 장미들을 ‘장미’로 퉁 치면서 지금까지 몇 송이의 장미를 지나쳐 왔을까.
‘생긴 거 보니 고집불통 같아,
말이 없는 것 보니 꿍꿍이가 있어,
OO 출신 사람은 무뚝뚝하더라,
B형 남자는 이기적이야.’
일부만을 보고 혹은 관련 없는 정보를 연결해서 판단하고 정의 내리는 것을 라벨링이라 한다. 한번 꼬리표가 붙으면 반대되는 사실이 나타나도 받아들이기 어려워진다. 치우친 사고이자 여지가 없고 호기심도, 애정도 말라버린다. 이런 사고의 굴레를 계속 돌다 보면 ‘원래 그래’, ‘그럼 그렇지’에 빠지기도 한다.
이기적인 그 남자, B형이 아닌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선뜻 다가오지 못하고 기브 앤 테이크를 계산하는 것은 그의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는 뜻이고 자신의 선의가 거절되는 경험을 했거나, 실연했거나 실망했을 수 있다. 자신을 챙기느라 급급하다는 것은 긴장과 두려움일 수도 있다. 타인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리는지, 실연의 아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지, 타인과 세상에 대한 불안에 쌓여 있는지 각각의 가능성을 가늠해보고 알아가 보는 건 어떨까.
가시에 찔린 경험, 알레르기로 눈물 콧물 뺐던 경험, 뼈아픈 전 남자 친구와의 추억이 있다고 해서 장미의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장미를 볼 때마다 피하고 싶고 마음이 쓰린 것은 나의 문제이지 장미의 문제가 아님을 알 필요가 있다. 장미를 멀리할지언정 장미를 부정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한두 번의 상처에 매여서 고통을 받는 것을 트라우마라고 한다. 타인으로 인한 거절감은 작거나, 크거나의 문제이지 누구나 상처를 입고 살아간다. 그 손상으로 인해 사람들은 방어적이고 공격적인 자세를 취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의 상처를 상대에 씌워버리지 않는 것! 그래야 나는 너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회복도 새로운 관계도 가능하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려면 전제가 필요하다. 나의 욕구가 무엇인지를 알고 경계를 공고히 하는 것이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선명한 바운더리를 갖는 것이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만큼이나, 나의 마음을 잘 알아차리고 지켜내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상대를 고려하는 것을 나를 희생하라는 맥락쯤으로 이해하고 행동한다. 하지만 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으로부터 존중과 배려가 가능해진다. 아무리 아름다운 피사체도 일정한 거리에서 바라봤을 때, 가장 잘 볼 수 있다.
자신의 바운더리를 지키지 못하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흔들린다면 자동적 반응을 멈추고 나의 감정과 생각이 주는 신호에 귀를 기울여보자. 내가 무엇에 비교적 순하고, 어떤 가치는 양보할 수 없는지를 알아차릴 때면 그 자리에 울타리를 세운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아 벽이 아닌 울타리라 하겠다. 언제든 눈인사를 건넬 수 있는 높이이자, 단단하고 튼튼하면서도 유연하면 좋겠다. 나의 경계를 세우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투명한 시야를 가지는 것, 그것이 나와 네가 건강하게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