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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Apr 07. 2023

꽝손 아내를 위한 세레나데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연구대상이야

얼마 전 아내가 꽝손의 진면목을 또다시 유감없이 발휘했다. 가끔 5천 원짜리 로또 두 장을 살 때면 60개의 숫자 중 일치하는 숫자가 단 두 개뿐인 아내는 그 공식에 입각하여 이번에는 5천 원짜리 한 장을 사고 30개의 숫자 중 단 하나만 적중시키는 기염을 토한 것이었다. 이쯤 되면 이제는 진지하게 과학의 영역에서 연구해봐야 할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22번만 없었어도 진정한 꽝손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


큰 기대는 없었지만 그래도 낙첨은 낙첨이고 꽝은 꽝이었다. 아내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자 짧은 순간 실망의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예전 같았더라면 '당신은 하는 것마다 왜 그 모양이냐, 내가 어쩌다 이런 재물복이라곤 찾으래야 찾을 수 없는 여자랑 살게 된 건지 모르겠다'며 온갖 조롱을 퍼부었겠지만 내가 누구던가, 지난 20년 오욕(汚辱)의 세월을 견디며 생불(生佛), 즉 살아 있는 부처가 된 아르웬 아니던가.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 잔뜩 풀이 죽은 아내를 위해 곱디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었다.


"잇써~ 뷰리풀 라이~ㅍ(뷰리풀 라이~ㅍ) 난 너의 곁에 있을게(너의 곁에 있을게) 잇써~ 뷰리풀 라이~ㅍ(뷰리풀 라이~ㅍ) 너의 뒤에 서 있을게~~"

코러스 포함 1인 2역으로 완벽에 가까운 가창력을 선보이며 노래를 계속 이어 가려는데 아내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한마디 던졌다.

"니 지금 뭐 하는데?"


"뭐 하긴? 기죽은 아내를 위해 노래 부르고 있지. 어때 크러쉬랑 똑같은 거 같애?"

사뭇 진지한 표정과는 달리 마음에도 없는 말이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순간 마음의 준비를 했다. 천성이 배려라고는 없는 여자이니 좋은 말이 나올 리 없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일말의 기대를 안고 아내의 입만 쳐다보며 다음 반응을 살폈다.


이윽고 짧은 한숨과 함께 아내가 말했다.

"음...... 그러니까 말이지, 전혀 똑같지가 않아. 가창력도 엉망이지만 일단 비주얼에서 탈락이야. 아저씨, 그러지 말고 어디 가서 복면부터 구해보는 게 어떨까? 그거 쓰고 다시 생각해 보자."


비주얼이야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 쳐도 가창력까지 운운한 것은 충격이었다. 정작 본인은 세상 어떤 악기로도 낼 수 없는 오묘한 음에 돌고래조차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고주파 발성으로 음이탈 가득한 노래를 부르면서 학창 시절 단대 가요제에 참가해 무려 참가상에 빛나는 뛰어난 가창력의 소유자인 내 가창력에 태클을 걸다니 받아들일 수 없는 치욕이었다. 당장이라도 잘잘못을 따지고 싶었지만 그래 봤자 네버 엔딩 소 귀에 경 읽기임을 잘 알기에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달래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한바탕 해프닝이 끝나고 어느 정도 진정이 된 후 상을 차리는 아내 옆에 가서 어떻게 하면 당첨번호만 교묘하게 비껴갈 수 있는지 슬쩍 물어보았다. 예상대로 아내는 그렇게 행운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 왜 여태까지 1등 당첨 한 번 되지 못했냐며 정 답답하면 직접 가서 하면 될 것을 왜 굳이 꽝의 기운이 넘치는 자신에게 맡기는 거냐고 물었다.


사실 매번 반복되는 낙첨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아내에게 맡기는 데엔 나름의 깊은 뜻이 숨어 있다. 그동안 함께 살면서 아내는 내게 큰소리를 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가끔 홧김에 버럭 소리를 지를 때가 있긴 하지만 답답할 정도로 남편에 대한 의존도가 강한 편이고 기본 성격 자체가 소극적인 아내는 거기에 더해 결혼할 때 친정으로부터 전혀 지원을 받지 못한 것으로 인해 늘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런 아내의 기를 살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음에도 내 능력이 부족하여 지금까지 가시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어찌 보면 내가 아내에게 로또를 구매하도록 하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마누라 기 살리기 프로젝트>의 하나이고 '인생역전'이라는 로또 복권의 타이틀에 맞게 당첨의 영광을 안고 아내가 내게 큰소리를 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함이다. 그렇다고 해서 극히 확률이 희박한 1등이나 2등을 꿈꾸는 것은 아니다. 최대로 잡아 3등, 지극히 현실적인 목표인 4등만 되어도 아내 성격상 큰소리를 치고도 남을 것이기에 그 정도만 해도 만족할 생각이다.


불행히도 아직까지는 꽝손의 기세가 누그러지지 않아 낙첨의 연속이지만 언젠가는 아내가 대박(?)을 터뜨릴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날이 오면 크러쉬의 'Beautiful'보다는 좀 더 혀를 굴려야 하는 팝송으로 꽝손 아내를 위한 세레나데에 재도전하려 한다. 벌써 선곡도 끝마쳤다. 리처드 막스의 'Now and forever', 익스트림의 'More than words'와 함께 끝까지 치열하게 경합했던 Carry & Ron의 'I.O.U'를 부르기로 결정했다.


비록 한때 불륜 드라마의 삽입곡이라는 오명을 쓰긴 했지만 아무래도 제목과 가사를 고려했을 때 그 곡이 가장 잘 어울릴 것이라 생각한다. 언젠가 피아노 반주와 함께 그 노래를 부를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여보~~ 난 복면만 사면 돼. 이제 당신이 당첨될 차례야.'

오늘도 대책 없이 희망회로를 돌려본다.



https://www.youtube.com/watch?v=jVaRFHwH_i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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