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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Mar 30. 2023

아내의 과거를 알게 되었네

쌍화탕만 마시는 여자

종잡을 수 없는 게 사람 마음의 변덕이라더니 입맛도 그런가 보다. 젊은 시절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음식이 나이 든 후 갑자기 좋아지기도 하고 그와 반대로 하루 걸러 하루 먹다시피 하며 애정을 갖던 음식을 세월의 흐름과 함께 쳐다보지도 않는 경우도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만 극도로 혐오하고 멀리 하던 음식을 어느 순간 최고의 기호식품 반열에 올려놓는 행위는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불가능할 것 같은 그 일을 내 아내 이여사님께서 해내셨다.


비록 지금은 주무르다가 실패한 밀가루 반죽 같은 풍만한 뱃살과 코끼리 다리에 대적할 만큼 굵은 허벅지를 자랑하는 좌우성장형 몸매가 되었지만 30대 초반 출산할 무렵만 해도 아내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가녀린 몸매와 몸무게의 소유자였다. 애정지수는 그다지 높지 않았지만 행여 출산 후유증으로 고생이라도 하게 되면 그 여파가 고스란히 내게 전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해 산후조리가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큰맘 먹고 한의원에 가서 보약 한 재를 달여 진상했었다.


당시만 해도 아내의 취향이나 입맛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던 터라 그 정도만 해줘도 남편의 도리를 다 하는 것이라 믿었다.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내가 고마운 마음으로 잘 먹어주기만 하면 그걸로 된 거라 생각했었다. 처음 사흘 정도까지는 온갖 인상을 다 쓰긴 했지만 아내도 그럭저럭 잘 마셨기에 그렇게 잘 적응하고 괜찮을 줄 알았다. 


문제는 나흘째 되던 날부터 발생했다. 약 먹을 시간이 되어 준비를 하는 내게 아내는 나중에 알아서 잘 챙겨 먹을 테니 신경 쓰지 말라며 하던 일이나 하라고 했다. 그 말만 믿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잊고 지낸 것이 일주일쯤 되었을까 무심코 열어 본 냉장고 속에는 한약이 내가 마지막으로 본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가 싶어 하나하나 세어 본 결과 처음 내가 챙겨준 이후로 전혀 손대지 않은 게 확실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옆에 붙어 앉아 억지로 마시게 했다. 약을 먹지 않겠다고 울며 버티는 아이 달래듯 온갖 감언이설로 어르기도 하고 때로는 협박도 했지만 한 번 닫아버린 입을 여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다고 마치 죄인에게 사약을 억지로 먹이듯 강제로 입을 열어 때려 부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포기한 것이 약을 받아오고 2주일쯤 되던 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도저히 못 마시겠다고 애걸복걸하는 아내를 보니 억지로 먹여서 될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어 아깝지만 그냥 버리기로 했었다. 눈물을 머금고 남은 약봉지를 하나씩 뜯어 싱크대 배수구에 갖다 붓는데 20만 원이 넘는 돈을 버릴 때의 그 심정은 어떤 말로도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 일이 있은 이후로 한약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았다. 자연스럽게 '아내=한약 못 먹는 사람'이란 등식이 성립되어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몇 달 전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늦은 가을 어느 날, 몸살 기운이 있다며 아내가 온장고에 들어있는 쌍화탕을 꺼내서 꿀꺽 삼키는 것을 본 것이었다. 아무리 나이가 들면 입맛이 바뀐다 해도 그렇게 180도 변할 줄은 몰랐다.


그 모습을 보자 불현듯 예전에 읽었던 글이 생각나 장난기가 발동했다.

"당신, 한약 냄새라면 기겁하던 사람이었잖아. 그새 입맛이 바뀌기라도 한 건가? 아니다. 드디어 옛 생각이라 난 거야? "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냐는 아내에게 쌍화탕의 유래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깐 말이지. 아주 오래전 조선시대 내의원에 의원이 앉아 있는데 궁궐에서 일하는 남자 하나가 감기 기운이 있다고 찾아온 거야. 맥을 짚어 보니 양기가 빠져나간 듯 기운이 없고 맥이 풀어졌더래. 그런데 그 남자가 돌아가자마자 얼마 있지 않아 같은 증상으로 궁녀가 찾아온 거지. 그 의원이 단번에 알아차렸어. 이것들이 밤새 어딘가에서 뭔가를 '했네, 했어.'라고 생각한 거지. 그때 그 의원이 두 사람에게 만들어 준 약이 쌍화탕이란 거야. 체내의 음양과 기혈을 쌍으로 조화롭게 해 준다는 뜻에서 유래된 것이 쌍화탕(雙和湯)이란 거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아내를 향해 아마도 당신은 전생에 궁녀였고 그때 맛본 쌍화탕의 맛을 몇 백 년이 지나 환생을 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되찾은 게 아니냐고 말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며 길길이 날뛰던 아내는 분이 풀리지 않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내가 전생에 궁녀라 치고 아저씨는 그럼 뭐였다고 생각하는데?"

"나야 당연히 기본 골격도 좋고 글재주도 있으며 칼질도 제법 잘하니 문무를 겸비한 장군 정도 아니겠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내가 속사포처럼 쏘아대기 시작했다.

"웃기고 있네. 뼈대 좋은 마당쇠나 안 되었으면 다행이지. 아니다. 칼질을 잘하니 백정이었으려나? 그것도 아니면 망나니? 어딜 보더라도 장군감은 절대 아니지."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든 듯했던 그날의 대화는 그렇게 나의 일방적인 패배로 끝을 맺었다. 뒤늦게 맛을 들인 아내는 요즘도 피로감을 느끼거나 몸에 한기가 들 때면 어김없이 쌍화탕을 찾곤 한다. 이쯤 되니 그 옛날 실패했던 경험을 거울삼아 다시 한번 재도전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쌍화탕이나 한약이나 어차피 맛과 향을 놓고 볼 때 먼 친척 정도는 될 테니 다가오는 주말에 장 보러 가자고 꼬셔 한의원에 밀어 넣고 보약이나 지어볼까 싶다. 


"어명이오. 역적 이 나인은 지금 당장 보약을 받으시오~~"

멘트는 준비되었으니 이제 실행만 남았다. 벌써부터 그날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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