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눈물이 어울리지 않아요
평소 지각을 밥 먹듯 하는 아내였지만 그날은 늦어도 너무 늦었다. 피곤과 짜증이 쌓일 대로 쌓여 폭발하기 직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내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지만 뭐라 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아래위 눈꺼풀은 견우와 직녀가 상봉하듯 자꾸 만나려 애썼고 잔뜩 물을 먹은 종이처럼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서둘러 정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아내가 대역죄인 코스프레를 하며 고개를 푹 숙인 채 내 앞에 섰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차렷 자세로.
뭔가 사고를 친 게 분명했다. 속으로 제발 크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수습할 수 있는 사고이기만을 바라며 애써 무심한 척 마음을 가다듬고 물었다.
"또 뭔 사고를 치셨을꼬?"
"오다가 ㅂㅈ ㅇㅇㅂ렸어."
분명 한국말로 하는 말인데 도저히 알아듣기 힘든 자음 몇 개가 아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다시 한번 물었더니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얼마 전 사준 이어폰을 잃어버렸다며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몇 번이고 찾아봤지만 찾지 못하고 그냥 오는 길이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둘러 오다가 한쪽을 잃어버렸겠거니 생각했는데 자초지종을 다 듣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예상과는 정반대로 한쪽만 손에 꼭 쥔 채 나머지 한쪽과 케이스를 통째로 잃어버린 것이었다. 분실하기까지의 과정이 내가 상상했던 그 이상이었기에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만약 무선 이어폰 분실 후기 공모전이 있다면 능히 레전드의 반열에 오르고도 남을 일이었다.
버스에 승하차하다가 흘린 것도 아니고 길에서 뛰어다니다가 가방에서 떨어트린 것도 아니라며 한쪽을 꺼내서 귀에 꽂고 나머지 한쪽을 케이스에 넣어 가방 안에 집어넣었는데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얘기를 듣자 모든 과정의 퍼즐이 자연스럽게 맞춰졌다.
정리정돈 DNA가 전혀 없는 아내는 가방 내부도 정리할 줄을 모른다. 들어가는 것은 있어도 나오는 것은 거의 없으니 늘 가방 안은 잡동사니들로 가득 넘치는 편이다. 온라인 쇼핑몰의 가방 판매 광고 사진에 나올 법하게 완벽하고 깔끔하게 항상 제자리를 찾아 물건을 넣어놓는 나와는 달리 닥치는 대로 쑤셔 박아놓는 스타일의 아내 가방은 늘 위태로운 수준이었다.
그날도 분명 그랬을 것이다. 이것저것 가득 담긴 상태에서 제대로 가방을 잠그지도 않고 그 위에 얹어놓다시피 해놓고는 가방 안에 잘 넣었다고 생각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는 아무 생각 없이 가던 길을 걷다가 뒤늦게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 흘렸는지도 모른 채 막연히 그걸 찾겠다고 한참을 돌아다녔을 아내를 생각하니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마음 같아선 로맨스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살포시 안아주며 '뭘 그런 걸로 울고 그래? 내가 똑같은 걸로 하나 더 사줄 테니 울지 마.'라고 하는 게 맞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드라마일 뿐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모처럼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놓칠세라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여보, 이번에 신기록 세우셨어요. 무려 열흘 만에 버리시다니오. 지난번 전화기는 그래도 몇 개월은 버티셨잖습니까? 그런데 애도 아니고 눈물이라니, 이게 뭡니까? 보는 제가 다 부끄럽습니다."
장난기 가득한 내 말에 아내는 울다가 웃다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느 정도 마음이 안정되기를 기다린 후 그깟 10만 원 때문에 너무 속상해하지 마라 이르고는 집에 가자마자 폭풍검색을 시작했다. 기존 케이스가 탈착이 조금 불편해서 그랬던 것 같다는 생각에 이번에는 아예 가방 끈에 장착해 두고 충전케이스만 따로 뺄 수 있는 가죽케이스를 골라 장바구니에 넣었다.
너무 미안하다며 다른 액세서리는 필요 없다는 아내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결제버튼을 눌렀다. 따지고 보면 결과적으로 하루에 만 원씩 거리에 뿌린 셈이 되었지만 아내 탓을 하지 않기로 했다. 좀 더 세심하게 당부하지 않은 내 실수도 조금은 있었고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웬만한 일은 모두 공유하는 사이지만 이번만큼은 딸아이에게도 비밀로 하기로 했다. 깃털보다 더 가벼운 딸아이의 입을 통해 말이라도 튀어나왔다가는 가까스로 휴전상태를 맞은 모녀대전(母女大戰)이 재발할지도 모를 일이라 생각했다.
자식이 아무리 나이 들어도 어미 눈에는 그저 철부지 새끼로만 보인다더니 내겐 아내가 꼭 그렇다. 40대 중반을 훌쩍 넘긴 아내지만 내 눈에는 여전히 철부지 소녀로만 보일 때가 있다. 이번에도 그랬다.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처럼 불안하기 짝이 없는 아내를 보면 늘 걱정이 한가득이다. 아무래도 아내를 끝까지 관리하는 것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숙명이자 운명이고 그렇게 하는 것만이 내 사명이란 생각이 든다.
새 이어폰을 사주고 사흘이 지났다. 딸아이에게 비밀로 해주는 대신 12시간 간격으로 이어폰 두 쪽을 손에 올려두고 인증 사진을 찍어 보내달라는 말에 피식 웃고 끝내는 것을 보니 여전히 아내는 정상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한 듯하다. 고리눈을 부릅뜬 채 이를 악물고 "이제 좀 그만 하지?"라는 말이 나와야 정상인데 아직 그 상태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루빨리 아내가 제 컨디션을 회복하고 예전처럼 내게 큰소리 뻥뻥 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오랜만에 주도권을 쥐긴 했지만 팔자에 없는 왕 노릇을 하려니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아무래도 내 몸엔 머슴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게 분명 하단 생각이 든다. 10만 원이란 거금을 들여 얻어낸 이 소중한 주도권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