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골녀의 도시녀 변신 프로젝트
작년 연말쯤 아내가 서랍 속에 잠자고 있는 유아용 이어폰을 꺼냈다. 언젠가 <배숙희 나빈손>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사고 사은품으로 받았던 것이었다. 딸아이가 어릴 때 받긴 했지만 눈이 높기로 유명한 딸아이 눈에 그게 찰 리 없었기에 며칠 쓰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어느새 서랍 속에 들어가 잠자고 있던 녀석이었다. 비록 싸구려 제품이긴 해도 블루투스 이어폰을 갖고 있던 아내가 새삼스럽게 그걸 왜 꺼냈나 싶어 물어보니 기존에 쓰던 게 소리가 들렸다 안 들렸다 해서 혹시나 사용할 수 있을까 싶어 꺼내봤다고 했다.
마음 같아선 그날 당장 새것으로 사주고 싶었지만 무턱대고 저질렀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를 일이기에 그냥 모른 척하고 말았다. 아내는 여러모로 다루기 힘든 유형의 사람이다. 주변을 떠도는 <카더라 통신>에 따라 '여자는 꽃을 좋아한다 카더라.'와 '여자는 고급백을 좋아한다 카더라.'를 맹신하고 그대로 따랐다가 날벼락을 맞은 것도 여러 차례였던 터라 신중한 접근이 필요했다.
연애 초기 장미꽃 100송이를 안겼다가 그 꽃송이 개수만큼의 기간 동안 욕을 먹기도 했고 언젠가 큰맘 먹고 백화점에 가서 거금을 주고 명품(?) 백을 사줬다가 '야이 미친놈아! 차라리 그 돈을 나한테 줬어야지.'라는 말과 함께 다음날 바로 반품을 하러 가는 굴욕을 맛보기도 했었다. 그런 몇 번의 실수와 실패 끝에 깨닫게 된 것은 이 여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타이밍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운 불법 비디오보다 더 무서운 여자)
해를 넘기고 아이가 방학을 맞은 후 대화할 기회가 많아진 틈을 타서 분석에 들어갔다. 사실, 음악에 거의 문외한에 가까운 아내가 이어폰이 뭐 그리 필요할까 싶어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를 걸어주는 것은 아닌가 망설이던 차에 딸아이의 몇 마디 말을 듣고 빠른 시일 내에 사줘야겠다고 결심했다.
"엄마, 가게에서 일하다가 통화할 때랑 가끔 드라마 같은 거 볼 때 쓰는 거 같던데. 집에 올 때 걸어오면서 음악 듣는 거 같기도 하고."
없어도 그냥 버티기만 하는 아내의 성격상 절대 먼저 말을 꺼낼 리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나는 두 달이라는 인고의 시간을 거쳐 드디어 행동에 들어갔다. 방학과 함께 시작되었던 모녀대전(母女大戰)도 나의 뛰어난 중재능력 덕분에 다행히 종전 선언을 했던 터라 아내도 꽤 홀가분한 상태였다. 게다가 딸아이의 개학과 더불어 식단 조절과 함께 운동에 돌입한다는 나의 다이어트 선언으로 인해 매 끼니 뭘 해먹일까에 대한 고민 일부도 덜어주었으니 금상첨화였다.
D-데이는 한 주의 시작인 월요일로 잡았다. 주말을 보내고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는 피곤함을 잘 알기에 작은 선물 하나로 그 피곤함을 잊게 해주고 싶었다. 자고로 선물이란 것은 벼락같이, 느닷없이, 뜬금없이, 전광석화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하는 것이 최상의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지만 거의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내의 취향 때문에 모든 걸 혼자 결정하고 실행에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라 만반의 준비를 갖춘 후 최소한의 결정만 내리도록 배려했다.
예상했던 대로 과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짧은 대화가 오고 간 후 결제를 하고 이어폰 케이스와 워치 커버 같은 액세서리를 추가로 주문했다. 더 필요한 것은 사용을 하다가 추후 본인의 판단에 맡기기로 하고 거의 3개월 정도 고심했던 '마누라 기살리기 프로젝트'는 끝을 맺었다.
처음 아내를 만났던 날, 아내의 수수한 모습이 좋았다. 믿기 힘들겠지만 지금까지도 노메이크업을 고집할 정도로 화장이라고는 하지 않는 모습과 온갖 장신구를 동원해 치장을 하지 않는 날것 그대로의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같이 살면서 그렇게 꾸미는 시간에 1분이라도 더 잠을 더 자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이었음을 알고 뒤늦게 뒷목을 부여잡을 만큼 실망하기도 했지만 아내는 그런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런 사람이다. 옆에서 잔소리를 해가며 억지로 밀고 끌지 않는 이상 절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내였다.
카운터에 서서 하루에도 100여 명이 넘는 고객들을 접하다 보면 아내 또래의 멋쟁이 여성들을 만날 때가 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찰랑거리는 웨이브 머릿결을 가진 고객을 보면 '저기... 고객님, 그 펌의 이름은 도대체 무엇인가요?'라고 묻고 싶을 때도 있고 아내가 입었으면 잘 어울리겠다 싶은 옷을 입은 분을 볼 때면 뒤따라가서 어느 회사 제품인지 물어보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런 분들을 만날 때마다 자연스럽게 아내와 비교되는 게 사실이다. 한동안 내 아내는 꾸밀 줄도 모르고 왜 저렇게 촌스러운 모습을 고집하는가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나마 젊은 시절엔 젊음을 무기 삼아 버텼다고 하지만 이제 아내도 어느덧 40대 후반에 접어든 나이가 되고 보니 그 나이대에 맞게 적당히 꾸미고 다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여전히 아내는 긴 생머리를 고무 밴드로 질끈 묶고 다니고 일할 때 거추장스럽다는 이유로 늘 편한 복장만 고집한다. 스스로 뭘 하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라 늘 따라다니며 관리를 해줘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이렇게라도 뭔가를 해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오래전 어느 광고에 나왔던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라는 카피가 유행했던 적이 있다. 바꿔 말하면 여자도 남자 하기 나름 아닐까?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어느 유명한 가수가 몇백억 대 부동산 사기 가해자가 된 아내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함께 사는 이유에 대해 기자가 묻자 "그 사람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고 아마 폐인처럼 살다가 죽었을 것이다."라며 짧은 말로 답했었다. 그분의 사정을 100% 다 알지 못하지만 그 심정만큼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기에 그 한마디 말이 내 가슴속에 콕 박혔다. 가끔 터무니없는 짓을 해서 사람 속을 뒤집어 놓긴 하지만 그래도 아내 덕분에 내가 이 정도로나마 살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미운 마누라 떡 하나 더 주는 이 짓거리는 앞으로 당분간은 계속 이어질 것만 같다. 그게 내 운명이란 생각이 점점 짙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