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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Mar 03. 2023

입 한 번 잘못 놀린 그 죄가 크다 하겠다

혹 떼려다가 혹을 붙인 그날 나는 분노의 칼질을 했다

지금은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내가 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학교에서 반강제로 적금 가입을 유도하는 일이 있었다. 국민학교 6년 시절도 그랬었고 중고등학교 6년의 시간에도 각각 3년 만기로 정해둔 적금을 가입했었다. 전적으로 학생과 학부모들의 자율적 판단에 따른다는 은행 직원의 설명과는 달리 선생님들은 마치 실적 경쟁이라도 하듯 금액 높이기와 100% 가입을 강제했었고 그때마다 나는 돈이 없어서 해줄 수 없다는 부모님과 전쟁을 해야만 했었다.


그 일은 고등학교 입학 후에도 똑같이 반복되었다. 월 납입금이 최저 8,800원에서 최대 2만 원이던 상품들의 설명이 적힌 안내문을 들고 집에 간 나는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어머니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각각 대학원과 대학에 다니는 두 형님 뒷바라지하기에도 급급한 상황에서 여윳돈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단순 비교는 힘들겠지만 당시 버스 요금이 100원 하던 시절이니 지금 기준으로는 매월 10만 원 내외 정도의 돈이 빠져나가는 셈이니 어머니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되긴 했다. 어쨌든 울고 불고 매달리고 생떼를 쓰다시피 해서 가까스로 월 8,800원짜리 상품 가입을 허락받은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다음날 학교로 갔다.


문제는 학교에서였다. 이미 선생님의 강압에 굴복한 대부분의 친구들이 만 원짜리 상품에 가입한 상황에서 나 혼자 8,800원짜리 상품 가입서를 내밀었으니 선생님 입장에선 내가 옥에 티처럼 보였던 모양이었다. 나 때문에 계산이 복잡하다느니 거스름 돈을 준비해야 한다느니 갖은 이유를 들이대며 나를 협박하기 시작했다. 


단지 나 혼자 저렴한 상품을 가입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교무실에 불려 간 것만으로도 화가 날 지경인데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대는 선생님 말씀이 듣기 싫어 홧김에 이를 악물고 한마디 내뱉었다.

"그게 그렇게 힘든 일인지 모르겠지만 선생님 대신 제가 애들 적금받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 말 한마디를 잘못 꺼낸 죄로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조직도에도 들어가지 않는 '저축부장'이라는 희한한 감투를 쓰고 말았다.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최근 들어 그 생각을 떠올리게 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그 사건은 입 한 번 잘못 놀린 것에서 비롯되었다. 오롯이 집안 살림에만 집중할 수 없는 아내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아내는 적어도 요리에 있어서만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 한다. 다른 영역에선 시키지도 않는 짓을 곧잘 저질러 사고를 치는 아내가 유독 요리에 있어서만큼은 검증된 것만 하니 늘 그게 불만이었던 나는 그날도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조심스럽게 아내에게 접근했다.


“저기…… 여보님, 우리 뭐 좀 색다른 걸 해 먹으면 어떨까 싶은데 말이지. 돌림노래처럼 늘 먹던 것만 먹어야 하는 우리 부녀가 불쌍해 보이지 않아? 요즘 세상 좋아졌잖아. 검색만 해도 각종 요리 레시피가 줄줄이 비엔나처럼 이어지는데 이건 의지 문제라고 생각해."


불같이 화를 내면 어쩌나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아내는 비교적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그렇게 불만이시면 직접 해보시든가요. 솜씨 좋다고 입으로만 떠들지 말고 당신의 능력을 보여줘. 뭐든 나보다 더 잘한다고 그러지 않으셨나? 나는 의지가 부족하니 의지가 강한 당신이 하는 게 맞는 거 같아.”


괜히 말을 꺼냈나 싶은 생각에 후회가 막심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안 하겠다고 하면 당분간은 의지가 부족한 인간 취급을 당할 게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기에 마지못해 알았다고 말했다. 그날부터 머릿속은 메뉴를 뭘로 정해야 3인 3색, 입맛이 제각각인 우리 가족 모두가 행복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빠져 들기 시작했다.


최근 치아교정에 들어가서 미각을 잃어버린 딸년과 입이 짧기로 유명한 마누라를 동시에 만족시킬 메뉴가 뭘까 사흘 밤낮을 고민한 끝에 결정된 메뉴는 짬뽕 국물이었다. 얼큰한 국물을 즐기는 아내와 목이버섯이 들어간 짬뽕 국물이라면 환장하는 딸아이의 입맛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그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검색과 유튜브 영상을 몇 개 쓰윽 훑어본 후 일요일 아침에 주방에서 오랜만에 솜씨를 발휘했다. 뭐 도와줄 거라도 있으면 말하라는 아내에게 힘이 많이 드는 마늘 다지기(이렇게라도 복수를 하고 싶었음)를 시키고 나는 열심히 웍을 돌리고 돌리고 또 돌리며 땀을 뺀 끝에 완성하고 대망의 품평회가 시작되었다. 다행히 두 여자의 평은 호의적이었다. 평소 많이 먹지 않는 아내도 그릇에 얼굴이 비칠 정도로 깨끗이 한 그릇을 비웠고 맛에 대한 평가가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팩트 폭격기 딸년도 시크한 말투로 짧게 “맛있어.”라고 말한 것을 보니 대성공이었다. 


가까스로 위기를 넘기고 설거지를 하는 도중에 두 여자를 향해 '과연 내 재능의 끝은 어디인가'라는 말을 꺼내려다가 참았다. 그 말이 불러올 파장이 얼마나 위험한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차마 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아내를 향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여보님의 손맛이 들어간 돌림노래가 그립습니다. 저는 일주일 내내 김치찌개만 먹고도 잘 버틸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돌림노래 계속 불러주실 거죠? 그렇게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충성~!"




<마음의 소리> 

씨발, 정녕 이렇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이토록 비굴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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