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다른 눈물샘을 가진 부부 이야기
나이 오십 넘게 살아오는 동안 사람들로부터 냉정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간혹 어떤 이들은 감정의 흐름이 일반인들과는 많이 다른 편 같다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같은 영화를 보고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인공 누가 불쌍하다는 얘기를 할 때면 나는 그렇게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조목조목 언급하며 자업자득이라 주장했고 드라마를 볼 때도 극 중 누군가가 죽기라도 하면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는 것과는 달리 유독 나 혼자만 극의 흐름상 죽을 때가 되어 죽었을 뿐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곤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은 아니다. 조금 엉뚱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나는 남들이 웃고 즐기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가 뜬금없이 눈물을 쏟는 경우가 많다. 최근 들어 즐겨 보는 <골 때리는 그녀들>에서 어떤 연예인이 입문 몇 개월 만에 첫 골을 터뜨렸다든가 전패(全敗)의 기록을 이어가던 '아나콘다'라는 팀이 첫 승을 올렸을 때는 마치 내가 그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눈물을 줄줄 흘리곤 했다.
이런 나를 두고 아내는 갱년기가 왔다는 증거라며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하지만 <무한도전>에서 어려운 미션을 수행했을 때도 그랬고 <남자의 자격> 합창 편에서도 그랬으며 심지어 <투유 프로젝트 슈가맨>에 7 공주가 나와서 노래를 부를 때엔 대놓고 대성통곡했던 것처럼 오래전부터 이런 증상이 있었기에 단순히 그게 이유라고 말할 수는 없다.
스스로 진단하기에 감정이입을 하는 대상이 조금 특이하고 눈물 흘리는 포인트가 남들과 다를 뿐 외계인 취급을 받을 만큼 메마른 감정의 소유자는 아니란 뜻이다. 단순히 감정이입과 눈물샘이 터지는 포인트만 놓고 보자면 오히려 나보다는 아내가 더 유별난 편이다. 지난 20년간 함께 살며 아내가 눈물 흘리는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아내는 독특한 감정의 소유자다.
며칠 전, 모처럼 아내와 함께 TV를 통해 <한.블.리>라는 프로그램을 볼 때도 그런 모습은 여지없이 드러났다. 과속하던 트럭의 추돌로 인해 목숨을 잃은 어느 운전자의 영상을 보다가 그 사고로 엄마를 잃은 딸아이가 아빠를 끌어안고 "엄마 보고 싶어."라며 울음을 터뜨리고 "아빠 운전 조심해야 돼, 아빠도 죽으면 안 돼."라는 말을 했다는 얘길 들으니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진행자인 한문철 변호사도 눈시울이 붉어지고 거기 있던 게스트 모두 폭풍 눈물을 흘리는데 단 한 사람 내 옆에 있던 아내는 다른 세상 사람처럼 무덤덤하게 과자만 먹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화면을 가리키며 저런 장면을 보고도 과자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냐고 물었더니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 아내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뚝뚝하기로는 정평이 난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감정을 가진 사람인 이상 이건 아니다 싶어 저런 영상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냐고 다시 한번 물었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답이 걸작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살아 있을 때 잘하란 말이야."
만약 입장이 바뀌어 아내가 주로 운전을 하고 내가 그런 질문을 받았더라면 아마 조심해서 운전하되 가급적이면 큰 차 주위에 있지 말고 차선 변경을 하더라도 뒤에 큰 트럭이 달려오는 게 보인다면 먼저 보내고 들어가라는 식으로 구체적인 방법론을 얘기했을 것이다. 사람의 생각이 아무리 다르다 해도 어떻게 그런 기적의 논리로 황당한 결론을 도출해 내는 것인지 나로서는 이해불가였다.
방송이 끝난 후 여운이 짙게 남은 가슴을 진정시키며 아내를 향해 어떻게 사람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수 있는지 물어보려다가 이내 생각을 접었다. 여전히 가슴팍에 과자 봉지를 안은 채 해맑은 표정을 짓는 아내의 얼굴을 보자 제대로 된 답을 듣긴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눈으로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분명 그 얼굴은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던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 2대 황제 유선이 낙불사촉(樂不思蜀, 아래 설명 참고)의 고사가 만들어진 그 당시 그 표정처럼 보였다.
지금 당장 내게 닥친 일이 아니니 아무 상관없다는 생각, 나만 아니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이 아내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아 그날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내 맘대로 결론을 내린 것일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이 말하기를 정치인이 갖추어야 할 것으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꼽지만 나는 측은지심이야말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할 가장 기본이 되는 덕목이라 생각한다. 측은지심이 있어야 남을 배려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고 타인을 위한 희생이 가능하다고 본다.
불행히도 아내에겐 그런 측은지심이란 감정이 많이 부족한 것 같다. 젊은 시절 한 때, 연애를 한다면 작은 선물에도 감사하고 작은 것에도 감동받을 줄 아는 여자를 이상형으로 생각했었다. 결과는 정반대, 큰 선물에도 시큰둥하고 큰 것에도 전혀 감동하지 않는 인조인간을 능가하는 여자를 만났다.
몇 년 전 감기를 심하게 앓았던 날, 소 닭 쳐다보듯 무심한 아내에게 상처받아 '당신은 내가 죽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여자 같다.'는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그때는 농담처럼 했던 말인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게 현실이 될 것만 같은 불안감을 지울 수가 없다. 내가 죽는 날도 과자 봉지를 끌어안고 있을 아내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그전에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아내의 막힌 눈물샘을 뚫어야 할 텐데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낙불사촉(樂不思蜀)
서기 263년 중국 삼국시대 한 축을 담당했던 촉나라가 멸망하고 후주(後主) 유선(누구나 다 아는 유비의 아들)은 위나라의 수도 낙양으로 끌려가 안락공(安樂公)에 봉해진다. 그런 유선을 위해 위나라의 대장군 사마소가 연회를 열었는데 그 자리에서 촉나라 음악이 연주되자 주변에 있던 많은 촉나라 출신 사람들이 망국의 한을 달래며 눈물을 흘리는데 유독 유선만 잔치를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본 사마소가 유선에게 음악을 듣고도 촉나라가 그립지 않냐고 묻자 유선이 "음식이 맛있고 지금 생활이 만족스러워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했고 그 말을 들은 사마소가 혼잣말로 "제갈공명 아니라 제갈공명 할아비가 와도 촉의 멸망을 막을 수는 없었겠구나."라고 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