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아르웬 Jan 18. 2023

세상에 나쁜(?) 마누라는 없다

훌륭한 남편은 있지만

"며칠 안 가서 똑같아질 거 같은데."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무심하게 던진 딸아이의 한마디 말에 아내는 눈에서 레이저를 발사했고 옆에 있던 나는 흐뭇한 미소와 함께 아내 몰래 딸아이에게 엄지 손가락을 슬며시 치켜세웠다.


사건은 평화로운 토요일 아침, 모처럼 일찍 퇴근한 내가 마침내 때가 되었다는 판단 하에 무려 4년째 벼르고 벼르던 칼을 뽑으면서 시작되었다.

“여보님, 허락만 해주신다면 제가 주방 정리를 완벽하게 해 보겠습니다. 믿고 맡겨 주십시오.”

여전히 잠에 취해 비몽사몽인 아내를 향해 잔뜩 주눅이 든 채 납작 엎드려 마마님의 윤허만 기다렸다. 

"안돼, 하지 마, "

흔쾌히 허락할 거라는 기대는 없었지만 아내는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단호했다.


자신의 남편이 한번 시작하면 가히 혁명에 가까운 대공사를 하는 사람임을 잘 알기에 또 얼마나 버리고 뜯어고칠 것인가 우려스러운 마음에서 그랬던 것이다. 하지만 나도 이번만큼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아내 기준에선 '혼돈 속의 질서'라고는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도저히 사람 사는 곳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엉망인 주방을 볼 때마다 없던 병이 생길 정도였기에 이번이 아니면 또 언제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강했다.


정작 육체노동을 해야 하는 당사자는 읍소에 가깝게 매달리고 편안하게 누워 있을 사람은 반대를 하는 희한한 상황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일단 저지르고 봐야 했기에 다른 방법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푹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달라져 있을 거라는 점을 재차 강조하며 매달리다시피 해서 겨우 허락을 받고는 그 즉시 대대적인 정리에 들어갔다. 목표는 주방 공간의 확보였고 작전명은 ‘허허벌판’이라 정했다.


아내는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정리와는 담을 쌓은 사람이다. 기본적으로 정리 센스가 부족한 데다가 한 번 물건을 꺼내면 다시 제자리에 넣는 법이 없었다. 요리를 하기 위해 선반이나 서랍에 있는 조리도구나 양념통, 그릇을 꺼내면 싱크대 위 빈 공간에 아무렇게나 펼쳐놓고 정신없이 요리를 하고는 모든 게 마무리된 후에도 그 자리에 그대로 둘 정도였다.


처음 한두 번은 바빠서 그랬으려니 생각하고 틈나는 대로 대신 정리를 해주거나 요리할 때마다 옆에 붙어서 '시다바리' 노릇을 하곤 했지만 잠깐 한눈이라도 팔면 순식간에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렸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싱크대 위 공간을 활용해 거치대를 놓으면 조금 나을까 싶어 거금을 들여 설치했지만 오히려 그건 불난 집에 기름을 때려 부은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일정한 공간이 주어짐과 동시에 그 거치대에는 오만가지 잡동사니들이 뒤엉켜 탑을 쌓기 시작했다. 치킨이나 피자를 시켜 먹을 때 함께 들어오는 일회용 소스, 먹다 만 생라면, 왜 거기 있어야 하는지 모를 머리끈, 케이크를 사면 딸려오는 플라스틱 칼까지 버려야 할 것들이 자리를 차지하자 정작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양념통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지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 시간이 정확히 4년이었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스테인리스 거치대는 녹이 슬기 시작했고 바닥에는 물때가, 벽에는 묵은 기름때가 쌓이기 시작했다. 웬만하면 그냥 참고 살았을 것이고 아내와 나 단 둘만 있었다면 보기 싫어도 외면하면 그만이었겠지만 한창 보고 배워야할 딸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너무 앞서가는 생각인지는 몰라도 살림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딸아이를 만나게 될 미래의 내 사위가 겪을 고통에 대한 걱정과 함께 이 땅에 불행한 남편은 나 하나로 끝났으면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동안 애써 모른 척한 결과겠지만 서랍과 수납장은 예상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이었다. 한마디로 균형이 맞지 않았다. 자주 쓰지 않는 물건이나 버려도 무방할 집기나 용기들이 수납장 하단부에 위치하고 있었고 상단은 빈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쓰임새가 드문 것들을 상단으로 옮기고 아내 키에 맞춰 하단부에는 자주 쓰는 물건들 위주로 공간을 채우거나 차후 아내가 쓸 수 있도록 일정한 공간을 비워 뒀다. 버려야 할 것으로 판단되는 것들은 한 곳에 모아두고 아내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 누가 봐도 쓰레기라 해도 아내가 아니라면 아닌 것임을 잘 알기에 마음대로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쓰레기 논쟁으로 시작해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관련 글 링크 걸어드립니다. 보실 분은 살짝 클릭)


대부분의 정리가 끝날 무렵 잠에서 깬 아내가 나와서 함께 마무리 작업을 했다. 다행히 내가 버리려고 꺼내놓은 물건들에 대해서 크게 반대하지는 않았고 내심 만족을 했는지 브리핑하듯 정리 과정을 하나하나 짚어주는 내게 "됐어, 그만~~~ 오늘은 거기까지."라고 짧게 말했다.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그게 아내 입에서 나오는 최고의 찬사임을 잘 알기에 나도 더 이상 말을 더하지는 않았다.


그 후 2주일의 시간이 흘렀지만 며칠 가지 못할 거라는 딸아이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우리 집 주방은 내가 뒤엎은 그 상태 그대로 깔끔함을 유지 중이다. 집이 갑자기 넓어진 것 같다는 딸아이의 말에 그건 일종의 착시현상일 뿐이라며 앞으로도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가족 모두가 최선을 다 해야 한다고 말해줬다.


간혹 동물 관련 프로그램에 문제견이 나왔을 때 그 원인을 찾는 과정 중에 훈련사가 그런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냥 나이만 먹었지 사회화의 경험이 전혀 없어요."

안타까운 비교가 될 수밖에 없지만 아내를 볼 때마다 그 말이 자꾸 떠오른다.


선천적으로 타고나기를 자유방임형으로 태어난 데다가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객지 생활을 하며 제대로 배울 기회 없이 나이만 먹은 아내가 관리감독형 부모님 아래에서 30년 가까이 철저하게 보고 배우며 살아온 내 눈에 부족하게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람 천성은 바뀌지 않는다고,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방향 지향식이면 안 되겠지만 부부 사이에 있어서도 고쳐야 할 땐 고쳐야 하고 가르쳐야 할 땐 가르쳐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단, 무턱대고 공격적으로 뛰어들다가는 강한 반발과 함께 충돌의 우려가 있으니 적절한 시기가 올 때까지 믿고 기다려주는 지혜 또한 필요하다.


나는 수많은 위기와 인내의 시간을 견디며 20년을 기다렸고 최근 들어서 변화의 조짐을 몸소 느끼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함께 있어 좋은 사람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