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드로잉 여행 21
희미한 아침안개 속에서 언뜻 언뜻 얕은 바다가 보인다. 얕은 바다에서는 마치 바닷물이 끓어오르듯이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마침내 떠오른 태양은 피어 오른 안개를 말려 버린다. 이제 도시는 서서히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바다위에 마치 전설속의 거대한 고래처럼 떠 있는 도시, 베네치아.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베네치아를 만나게 되면 좋겠지만 현실은 오늘도 기대를 배신한다. 매일 매일 수많은 관광객들이 산타루치아역을 통하여 쏟아져 들어오고 오버투어리즘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1800년대 철도건설이 시작되면서 이 자리에 있던 성당은 파괴되고 이제는 산타루치아라는 이름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어쩌면 관광객의 홍수는 이때 이미 예견되어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근사하고 멋진 곳이라도 사람들이 몰리면 망가지게 되는 것은 정말 순식간이다. 사람이 제일 무섭다.
2003년 처음 베네치아를 왔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도 길을 찾느라 이 골목, 저 골목으로 흩어져서 였을까. 지금은 모두 구글맵을 가지고 다니면서 길을 잃어버릴 수 없지만 그 때는 모두가 길을 잃었다. 빼곡한 골목과 운하로 가득 찬 미로와 같은 길을 가면서 머리에 손을 얹고 진지하게 지도를 쳐다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분명히 같은 곳을 찾아 간다고 하면서도 서로 다른 길로 가고 있다가 이름 모를 또 다른 작은 광장에서 만나 서로를 쳐다보며 웃으며 지나가곤 했다. 이렇게 베네치아에서 길을 잃어버린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비효율적이라고 할지 모른다. 그때나 지금이나 관광객으로 이곳에 왔지만 관광보다 여행에 가까웠던 것은 2003년 이었다.
관광객은 가장 빠른 동선으로 랜드마크에 도착해서 사진을 찍고 검색한 ‘맛집’에서 식사를 하고 다음 관광지로 광속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여행객은 느리다. 초행이므로 길을 잃어버리기 일쑤이다. 주변을 둘러보아 현지인처럼 보이는 사람을 찾아 길을 물으며 소통을 해야 한다. 게다가 현지인들의 길안내라는 것도 항상 신뢰하기는 어렵다. 잘 알지 못하는 길도 마치 잘 아는 것처럼 설명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내 주변에서 이런 사람 많이 봤다) 머리에 손을 얹고 짜증나도록 복잡한 지도를 해독해야 하고 또 다시 묻고 헤매는 일을 한 후에야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하게 된다. 관광으로 왔지만 이렇게 강제로 여행객 모드로 바뀌게 되면 같은 장소라지만 기억이 같을 수 없다.
2003년의 베네치아는 나와 아내에게 그런 기억을 선사해 주었다. 2003년 입사 2년차였을 때는 회사의 규모도 크지 않았고 정말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가을이 오면 각국의 지사장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곤 했다. 유명한 관광지 근처에서 하곤 했는데 2003년은 트레비소라는 곳이었다. 베네치아에서 30분도 채 안 되는 곳이다. 첫 회의였는데 본사에서 보내온 메시지가 아주 간결했다. ‘배우자 동반, 드레스 코드는 캐주얼’ ‘이건 뭐지’하는 기분으로 본사에 회의자료로 무얼 준비해가지고 가야 하는지 나에게는 첫 번째 회의니까 상세하게 알려 달라 했더니 ‘Nothing, just bring your wife and enjoy'. 혹시나 첨부파일이 있나 다시 봐도 그런 것도 없었다. 회의는 오전에 끝내고 오후엔 근처 관광지로 가서 즐기다가 저녁 먹고 다시 호텔로 돌아오는 ‘꿀을 빠는 출장’이었던 거다. 이런 판타지는 그로부터 수년 후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회사 규모가 커지면서 좀 더 효율적인 ‘회사다운 회사’로 변하게 된 것이다. 아! 왜 지나간 옛날은 언제나 아쉬운 것인가.
무라노섬의 유리공방도 데려가고 산 마르코 성당 앞에서 서로 사진도 찍어주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투어를 기획한 마이클이 사악한 미소를 지으면서 지도를 한 장씩 나누어 주더니 각자 알아서 즐기다가 저녁 식사 시간 맞추어 찾아오라면서 홀연히 골목길로 사라져 버렸다. 그 땐 그 미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삼삼오오 흩어져서 구경을 하다가 누군가 문득 지도만으로 목적지를 찾기에는 만만치 않은 곳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마치 꿀벌들이 멋진 꽃밭을 발견했을 때 정보를 공유하듯이 이 사실은 즉시 모든 회의의 참석자들에게 퍼졌고 혹시 길을 찾지 못할 때를 대비해서 조금 일찍 식당을 찾아보기로 했다.
같은 지도를 보면서도 의견이 분분해지고 그룹은 다시 소그룹으로 갈라져서 각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골목부터 탐색을 시작하였다. 베네치아의 골목길을 경험한 분이라면 눈길을 사로잡는 작은 상점과 아기자기한 골목과 광장 그리고 다리들을 기억할 것이다. 어깨를 맞대고 걷기엔 너무 작은 길, 그 길 끝에 자리를 잡고 있는 분위기 있는 가게, 마스크와 유리공예품들. 우리는 너무 순순히 유혹에 굴복했고 모두 길을 잃었다. 그 와중에 아내의 손에는 잠시 들린 기념품가게에서 챙긴 전리품이 들려져 있었다.
약속된 시간보다 거의 한 시간이 지나서야 찾아간 식당에는 마이클이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보면서 껄껄 웃는다. 베니스에서 와서 꼭 해봐야 할 일은 길을 잃어야 하는 것이라며 손을 잡고 흔들면서 즐거운 시간이 되었냐고 묻는데 덩달아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사실은 화를 내야 하는 일이었는데 말이다. 아주 잠깐 동안만이라도 여행자가 되어 가게에 들려 길을 묻고 헤매고 돌아다니면서 베네치아를 좀 더 알게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을까. 그날 밤 우리는 서로 길 잃어버린 이야기들로 웃고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로부터 한참 뒤 고등학생인 친척 아이와 함께 베네치아를 다시 방문한 적이 있다. 나는 길을 잃었던 기억이 너무 재미있어서 이 녀석에게도 경험시켜주고 싶었다. 조카녀석이 가고 싶은 ‘맛집’을 찾아두었다며 그 곳에 가고 싶단다. 마침 잘 되었다 싶어 지도를 주면서 한번 앞장서서 찾아가 보라고 했더니 ‘왠 지도’라는 표정으로 구글맵을 켜는 것이 아닌가. 이런 낭만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녀석 같으니라구. 아! 왜 지나간 옛날은 언제나 아쉬운 것인가.
이제는 더 이상 베네치아에서 낭만적인 길 잃기를 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베네치아는 가볼만 한 도시임에는 틀림없다. 지금은 수많은 관광객으로 인한 오염으로 하수도 같은 수로를 가지고 있는 낡고 초라해진 도시이지만(물론 산마르코 성당과 광장주변은 아직도 매우 감동적이다) 베네치아는 피렌체와 함께 르네상스를 주도한 도시국가이다. 나폴레옹에게 정복을 당할 때까지 무려 1천년동안 공화국이라는 정치체제를 유지하였다. 겨울철 비가 오고 조류가 오를 때(High tide)마다 바다에 잠기는 이런 연약한 나라가 1천년을 버텨왔다니. 게다가 아드리아해의 주변 국가들, 특히 지금의 크로아티아의 연안을 점령하여 식민 도시를 만들고 무역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유럽의 강대국과 이슬람세계 사이에서 살아남았다니. 현재의 베네치아를 보고 있으면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는다.
천년의 역사를 여기에 열거할 수는 없지만 조금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면 알 수 있다. 어떻게 공화국이라는 정치체제를 유지하면서 무역을 통하여 강건한 나라를 만들었는지. 도시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떻게 사회지도층들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며 위기극복에 앞장을 섰는지. 일례로 이슬람세력과 해상무역로 확보를 위한 전쟁이라도 벌이게 되면 도제(선출직 종신대통령)는 최전선에서 적과 싸우다 목숨을 잃곤 했다. 이런 것이야 말로 주변 강대국에 둘러싸인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니던가.
마르코 성당을 배경으로, 리알토 다리를 배경으로, 아이유가 앉았던 부라노섬의 예쁜 수로앞에서 또는 카페 플로리안에서 커피를 마시는 자신의 인생샷을 남기는 일을 하고 나면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어 도시의 골목을 돌아보기를 권한다. 광장 한 구석에 방치된 이제는 더 이상 쓰지 않는 우물의 뚜껑도 만져보고(인공섬에 우물이라니 이상하지 않은가) 낡아버린 건물 벽도 한번 쓰다듬어 보면서 가만히 공화국 천년의 기운이 느껴보자.
한번쯤은 구글맵을 끄고 지도를 보면서 원하는 식당도 찾아가 보고 의도적으로 길을 잃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추억을 만들 수 있다. 관광객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로마나 파리 같은 유명 관광지에서 지도를 들여다보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그건 바로 현지 소매치기나 좀도둑의 표적이 될 수 있으니 추천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아직은 그렇지 않은 작은 도시들도 많이 있다. 이런 곳을 여행할 때면 일부러 관광안내소에 들러 도시의 지도를 얻어 지도에 표기된 명소를 찾아간다. 현지인에게 길도 물어보고 가볼만한 식당 추천도 받고 이렇게 사람들과 적극적인 소통을 하면서 한 여행에 대한 기억은 구글맵과 트립어드바이저에만 의존한 여행과는 확연히 다를 것이다. 여행자의 여유와 미소를 가지고 현지인에게 접근해 보자. 기왕이면 친절해 보이는 예쁜 아가씨에게 물어보는 것도 좋겠다. 나의 경험으로 보자면 친절하고 예쁘게 생긴 사람들은 곤경에 빠진 듯 보이는 여행자를 돕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다. 완벽하게 계획된 여행보다는 우연한 일이 끼어들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오히려 더 행복한 여행을 만들 수 있을 거라 믿고 낯선 공간에서의 설레임을 다시 한 번 느껴볼 수 있기를······. 인생의 묘미는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있지 않던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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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진흥원 2022년 우수출판콘텐츠에 선정되어 출간의 기쁨으로 밤잠을 조금 설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