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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노그림 Sep 04. 2020

시에나 - 나른한 오후

방구석 드로잉 여행 17

  낯선 도시의 화장실에 갇혀 본 경험이 있는가. 오래된 건물의 화장실이어서 그랬는지 밖에서 잠겨서 안에서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이다. 소리를 지를 수도 없어 난감해하고 있는데 다행히 누가 화장실로 들어오려고 문을 여는 통에 나올 수 있었다. 어떤 도시에 대한 기억이 이렇게 원초적인 생리작용과 결합되어 있으니 이 도시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화장실이 떠오른다. 삐걱거리던 계단과 고장 나버린 손잡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던 근원을 알 수 없는 냄새. 나에게 있어 시에나(Siena)는 이렇게 냄새로 기억되는 곳이다.


  냄새는 촉감과 함께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게 한다. 기억하는 것에 좋고 나쁨이 있을 수 있을까? 기억을 받아들이는 마음은 좋고 나쁨을 가린다. 그렇다고 좋은 기억은 마냥 좋기만 할까. 좋은 기억이라는 추억 속에 갇혀 있다면 그게 과연 좋은 일일까. 나쁜 기억이 나를 단련시키고 한 번 더 뒤돌아보게 하고 앞으로 갈 수 있게 한다면 과연 어느 것이 좋은 기억이고 나쁜 기억일까. 떠오르는 상념은 뒤로 하고 다음번에 시에나를 방문하게 되면 다른 냄새, 다른 촉감, 다른 느낌으로 기억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 이런 개인적인 사연과는 별개로 시에나는 피렌체와 함께 토스카나를 대표하는 멋진 도시이다.


  왠지 모르게 나른한 느낌이 들게 하는 시에나는 조개껍데기처럼 생긴 캄포광장으로 유명하다. 캄포 광장은 살짝 경사가 있는 구조로 만들어져서 앉아있으면 뒤로 눕고 싶어진다. 실제로 누워 있는 사람도 많다. 이렇게 캄포 광장은 여행자의 게으름을 넉넉하게 받아주고 있다.



  하지만 여름이 오면 캄포 광장에 모래가 깔리고(조개모양의 광장에 모래라니 너무 완벽한 조합이지 않은가) 팔리오라는 경마 경주가 열린다. 시에나의 각 자치지역(콘트라데)을 대표하는 기수들이 안장 없는 말을 타고 캄포 광장에서 콘트라데의 명예를 위하여 경기를 벌인다.


  여름날의 장맛비가 들이닥치듯이 모여든 사람들은 도시의 골목마다 물결을 이루고 이 물결은 넘실거리면서 캄포 광장으로 흘러 들어온다. 몰려든 물결은 이제 그 열기로 스스로 기화하기 시작한다. 광장에 걸린 콘트라데의 깃발들은 아우성을 치듯이 휘날리고 기화된 공기는 폭발할 것 같은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이윽고 말들의 흥분은 최고조에 이르고 출발신호에 용수철이 튕기듯 기수와 한 몸이 되어 달려 나간다.


2분간의 절정!


절정을 보내고 기진맥진한 도시는 뜨거운 토스카나의 태양아래 몸을 눕힌다.                 


  시에나의 상징은 늑대이다. 로마를 세운 레무스의 아들이 세운 도시라고 알려져 있고 레무스는 엄마늑대(She Wolf)의 젖을 먹고 자랐으니 늑대가 도시의 상징이 된 것은 자연스럽다. 도시의 골목길을 탐색하고 다니다 보면 늑대 상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지금은 피렌체에 밀리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지만 시에나는 피렌체와 동등한 세력을 가진 강력한 도시국가였다. 지금도 시에나 사람들의 도시에 대한 애정은 잘 보존된 골목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이태리 소도시들의 골목이 그렇듯이 골목 곳곳에 맛있는 커피를 파는 카페, 가볍게 와인 한 잔 할 수 있는 비노테카, 전통 디저트를 팔고 있는 가게 등이 보석처럼 숨겨져 있다.                


  옥상정원에서 흘러 들어오는 빛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골목에 빨간 스쿠터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스쿠터의 주인은 어디로 간 것일까. 스쿠터를 그리고 있는 동안 갈색 머리의 아가씨가 말총머리에 앙증맞은 헬멧을 쓰고 나타난다. 스케치를 하고 있는 나를 보고 미소를 띤 채 다가와서 묻는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잠시 옆에서 지켜봐도 되느냐며 그림이 마음에 든단다. 시에나는 처음인지, 이 도시가 마음에 드는지, 어디서 무얼 먹어봤는지 참 궁금한 게 많은 친구다. 고개를 살짝 돌려 그림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옆얼굴을 보니 세상에나, 이렇게 길고 아름다운 곡선을 가진 속눈썹은 처음이다. 마치 속마음을 들킨 사람처럼 가슴이 콩닥거린다.         


  골목길은 자연스럽게 도시의 외곽으로 나가는 길로 이어져 있다. 외곽으로 나가서 도시를 감싸고 있는 전원을 바라보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이다. 시에나에는 오렌지길과 블루길이라는 2km정도의 산책길이 있다. 시간이 많다면 두 길 모두 천천히 돌아보면 좋겠지만 바쁜 일정이라도 그 중 하나 정도는 한번 걸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좀 느긋한 기분으로 도시의 골목길을 산책하고 가게의 쇼윈도에 마음에 드는 물건이 보이면 아이처럼 무릎에 손을 얹고 엉덩이를 뺀 채 구경도 한번 해보자. 목적지 없이 걷다가 혹은 목적지를 찾아 걷다가 길을 잃으면 어떤가.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아무도 모를 것 같은 나만의 작은 공간을 찾은 기쁨에 희열을 느낄 수도 있고 우연한 만남으로 도시에 대한 나만의 기억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지 않은가.


  2차 대전 중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있었다. 그 유명한 암호명 ‘디데이’이다. 디데이 전날 미국의 공수여단은 노르망디 외곽지역에 투하되어 후방 교란 작전 임무를 맡게 된다. 바람은 몹시 거세었고 독일군의 저항은 심했다. 그날 밤 노르망디 여기저기로 흩어진 병사들과 장교들은 즉흥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행동해야 했다. 나이 어린 병사가 묻는다.


  “우리 길을 잃은 건가요?”

  “그럴 리가. 우리는 노르망디에 있지 않은가.”


  전쟁 중 낯선 곳에 떨어져서 앞일을 예측할 수 없음에도 이런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데 하물며 우리는 안전한 곳을 여행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토스카나 토박이들은 지나치게 긍정적인 것으로 유명한 사람들이다. 시에나에서는 느리게 천천히 내일 해도 될 일을 오늘 하는 우(愚)를 범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 특히 여행하는 사람은 더 그렇다.


  누가 그랬다지. 네가 무얼 먹는 사람인지 알려주면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준다고. 먹는 음식만으로 정확하게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는 알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음식의 전문가가 아니라서 음식과 성향에 대한 고찰을 해본 적도 없고 맛집을 찾아다니는 사람도 아니다. 다만 음식의 가격과 전경이 근사한 곳에 있는 식당에 대한 몇 가지 편견은 가지고 있다.


  첫째, 전경이 근사한 식당의 음식 값은 비싸다.

  둘째, 음식의 가격과 맛은 비례하지 않는다.

  셋째, 진짜 토박이들은 뒷골목 식당을 좋아한다.

  넷째. 외부에 오늘의 메뉴를 붙여 놓은 곳은 기본은 할 것이다.


  이런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식당을 선택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최선의 선택이었는지 최악의 선택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성공이든 실패든 여행의 일부분이고 음식이 맛있었으면 그것으로 좋은 일이고 기괴한 맛이었다면 나중에 이야깃거리가 생겨서 좋다.        


  하지만 이태리에서라면 그다지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음식재료들로 만들기 때문에 기대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토스카나 사람들은 음식에 관해서 두 번째라면 관 뚜껑을 열고나올 정도로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던가.   


  시에나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음식으로는 3가지 보석이라 부르는 디저트가 있다. 까발루치Cavallucci, 리치아렐리Ricciarelli, 판포르테Panforte이다. 시에나 사람들은 이 디저트에 무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니 시에나에 들르게 되면 맛을 보는 것도 좋겠다. 원래는 크리스마스 음식이긴 하지만 이제는 아무 때라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었다.

  카발루치는 작은말이라는 뜻을 가진 아주 달콤한 쿠키이고, 리치아렐리는 겉은 바삭하고 안은 촉촉한 납작한 형태의 쿠키이며 예전에는 귀족들이 선호했지만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판포르테는 이름에 걸맞게 굉장히 강한 향을 내는 재료들로 혼합되어 있다. 시에나 사람들이 좋아하거나 말거나 디저트를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는 한 입만으로 족한 음식들이다.

 

 그래도 디저트를 좋아하는 분들을 위하여 아래에 가게이름과 주소를 남겨 놓았으니 혹시 지나가는 골목길에 이런 가게가 있으면 들르셔서 시에나의 단 맛을 감상해 보시기를······.

Nannini, Via Banchi di Sopra, 24

Pasticceria Nocino, Via Aretina, 13

Pasticceria Le Campane, Via Caduti di Vicobello, 37

Pasticceria Bini, Via Stalloreggi, 91

Peccati di Gola, Via E.S.Piccolomini, 43/45

https://brunch.co.kr/@jinho8426/193

출판진흥원 2022년 우수출판콘텐츠에 선정되어 출간의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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