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킷리스트
며칠 전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하다가 계단을 아장아장 걸어 올라오는 아이의 앞길을 비켜주느라 옆으로 서서 잠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머리에 떨어지는 느낌이 있어서 만져보니 비둘기 똥이었다. 아니 이 녀석들은 어쩌라고 날아다니면서 똥을 싸니. 에잇! 더러워. 하지만 똥을 밟거나 똥을 맞으면 재수가 좋거나 좋은 징조라고 여겨지는 것은 여러 문화권에서 공통적인 현상인 듯하다.
다이안 레인이 주연을 맡았던 <토스카나의 태양아래>에서 주인공이 비둘기 똥을 맞는 장면이 나온다. 다이안은 뉴욕출신의 이혼녀이다. 어떤 정신 나간 작자가 다이안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났는지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여전히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 인간세상이니 그것에 대하여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다. 이혼하면서 모든 것을 잃은 다이안은 친구가 예약해 놓은 이태리 여행에 등 떠밀려 참가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이 투어그룹은 게이그룹이다. 친구도 게이이다.
토스카나의 시골투어를 하던 중 마치 운명에 끌리듯이 오래된 주택에 마음을 뺏긴 다이안은 즉흥적으로 그 집을 사게 된다.(음? 쓰다 보니 프랑스 샤토에 살고계신 분이 떠오른다) 부동산 계약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쉬운 일이 아니다. 주인 할머니가 팔 듯 말 듯 뭔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뜸을 들이고 있다. 그때 집안으로 날아든 한 떼의 비둘기가 다이안에게 똥폭탄을 퍼붓고 간다. 할머니는 갑자기 환호를 지르더니 ‘사인’이라며 다이안에게 키스를 하면서 계약완료.
영화는 집을 고치러 온 인부들(폴란드 사람들이다. 인텔리 노동자도 끼어 있다)에게 이태리식 푸짐한 점심을 대접하고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올리브를 수확하고 갑자기 찾아온 인연과 다시 사랑을 시작할 것 같은 분위기까지 갈등이라곤 전혀 없이 맑은 수채화처럼 흘러간다. 토스카나는 여행자를 현혹시키고 심지어는 눌러 앉게 만드는 마력이 있는 곳인 듯하다.
토스카나는 이태리에서도 가장 풍광이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고대 로마가 세력을 펼치기 전에 이미 에트루리아 사람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고 나름 고도의 문화를 누리며 살고 있었던 듯하다. 지금도 이곳 사람들은 에트루리아인의 후손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피렌체와 시에나가 가장 유명한 토스카나의 도시이긴 하지만 주변으로 작고 아름다운 마을들이 편안한 구릉과 사이프러스 나무를 배경으로 그림과 같이 흩어져 있다. 만약 이태리에서 살아야 한다면 토스카나를 영순위에 올려놓고 싶다.
페렌츠 마테는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서 밴쿠버로 이주했다가 몬탈치노에 정착했다. 몬탈치노는 최상급 와인의 산지로 유명한 토스카나의 조그마한 마을이다. 페렌츠는 이곳에 정착하면서 거의 폐허나 다름없던 일 콜롬바이오 Il Colombaio를 샀다고 한다. 무성한 잡초와 가시덤불로 뒤덮인 포도밭과 올리브나무, 남아있는 삶의 흔적이라곤 지저분한 종이서류 뿐이었다고 했다. 쓰러져가는 수도원을 재건하여 살아 갈 수 있는 집으로 만들고 폐허가 된 포도밭을 개간하여 멋진 포도주를 만들어내고 텃밭에서는 엄청난 양의 채소와 온갖 먹을거리를 만들어내는 곳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는 왜 이곳에 정착했는지를 설명하면서 이해하지 못할 현대인의 생활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차고를 넓히고 불필요하게 큰 집을 소유하기 위하여 현재를 저당 잡힌 채 스스로 노예처럼 생활하고 있는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한다. 좋은 직장을 위하여 대학을 가는 것도 그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에게 있어서 대학은 ‘평생직장’을 낚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이 ‘없어도 살 수 있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라고 한다. 덤으로 평생을 할 여자 친구를 만나게 되면 더욱 좋고.
몬탈치노에 정착한 페렌츠는 시골생활의 정겨움과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는 땅에 대한 예찬으로 하루 종일이라도 수다를 떨 수 있다. 그 뿐이 아니다. 토스카나에서 만난 고집스러운 장인들, 예를 들면 피엔차의 일류 무두장이, 몬탈치노의 도공, 대장간을 하고 있는 피아조티네 집안, 거의 예술품에 가까운 창문틀을 만들어 내는 레오나르도, 빵집 주인 조반나, 근사한 프로슈토와 소시지를 만들어 내는 형제들, 200가구 정도의 브루넬로 와인을 만들어내는 미친 사람들······. 그의 입에서 나오는 토스카나 장인들의 목록을 듣는 것만으로도 반나절을 보내야 한다.
그는 이 사람들이야 말로 위기가 찾아오더라도 개의치 않고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 갈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여기 가족농장이 있다. 그가 아는 소규모 가족 농장의 본보기는 파올루치네 농장이다. 농지에는 주로 밀과 귀리를 심는다. 수확한 밀의 일부는 식구들이 먹을 빵과 파스타를 만들기 위해 곱게 제분하고 일부는 가축에게 먹일 수 있도록 거칠게 빻으며, 나머지는 외부에 판매한다. 포도밭에서는 2500그루에서 매년 4500kg의 포도를 수확한다. 4분의 1은 식구들이 마실 와인을 담고 나머지는 유리병에 담아 판매하며, 나머지는 포도수확업자에게 도매로 넘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올리브 밭이 있다. 토스카나산 올리브는 향이 진하고 혀끝을 톡 쏘는 맛이 있는데 인기가 매우 좋다. 올리브를 재배하는 것은 농부들의 꿈이라고 한다. 가지는 2년마다 한 번씩 치면 되고 땅을 갈거나 거름을 주는 것도 1년에 한번이면 족하기 때문이란다. 가축들도 있다. 돼지가 새끼를 낳으면 두세달 정도 기르다가 두세 마리만 남기고 시장에 내다 판다. 인기가 좋은 어미 젖을 먹고 자란 송아지도 넉 달쯤 키우면 팔 수 있다. 요리용으로 손질한 닭과 토끼도 판매한다. 신선한 달걀은 언제나 넉넉하다. 마지막으로 농장전체의 이곳저곳에서 자라고 있는 갖가지 채소와 과일나무가 있다. 토마토는 푹 끓여서 소스를 만들고 과일은 설탕에 졸여 보관한다. 겨울에는 땔감을 숲에서 구해올 수 있다.
농장은 바깥세상으로부터 거의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남은 것은 가축에게 먹이고 가축은 농작물에 필요한 거름을 제공한다. 쓰레기를 거의 배출하지 않는 완벽한 에코시스템이다. 물론 농장일은 매우 힘이 들고 병충해, 가뭄과 홍수와 같은 재해를 걱정해야 하고 하루도 쉴 틈 없이 일해야 한다. 하지만 새소리에 눈을 뜨고 깨끗하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일을 하고 숲에서 자연이 제공하는 먹을거리를 찾는 삶은 도시의 반쪽짜리 삶에 비하면 비록 돼지 똥을 치우더라고 진정한 지상낙원이라고 페렌츠는 힘주어 말한다.
다행스럽게도 이태리 시골에는 애그리투리스모Agriturismo라는 농가민박이 있다. 이곳에 지내면서 멋진 시골농장에서 농부들의 삶도 엿볼 수 있고 원한다면 같이 가지를 치거나 수확을 거들 수도 있을 것이다. 저녁에는 풍성한 이태리 시골밥상과 함께 농장에서 직접 담근 끝내주는 와인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토스카나는 아마도 가장 농가민박이 활성화된 곳일 것이다. 도시의 소모적인 생활에 신물이 난 많은 사람들이 다시 활력을 되찾기 위하여 찾는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물론 도시의 삶을 완전히 포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너무 먼 길에 있고 실제 농가의 생활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농가민박을 찾은 이유는 바로 낯설음을 체험하고 내 몸과 손을 사용하여 뭔가를 해냈다는 만족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페렌츠는 토스카나의 신선한 공기와 햇볕은 마음속에 쌓여있던 근심거리를 하찮게 만들어 준다고 했다. 뉴욕에서 페렌츠를 잠시 돕기 위해 온 X는 실연으로 인해 거의 송장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보다 못한 페렌츠는 그녀에게 일보다 산책을 권유했고 X는 한 달 만에 완전히 다른 매력적이고 유머가 넘치는 사람이 되었다. 뉴욕으로 돌아가서도 매력과 유머는 사라지지 않았고 ‘끝내주게’ 잘 나가는 친구가 되었다. 심지어 자신을 차버린 남자친구에게서 다시 구애를 받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토스카나의 태양이 마법을 부린 것이 틀림없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직접 가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에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지금 당장은 코로나바이러스때문에 현실감이 떨어진다고 생각되지만 더 늦기 전에 한 달 아니 보름만이라도 토스카나의 자연과 페렌츠가 말한 고집스러운 사람들 속에 섞여서 살아 보는 것을 꿈꾸어 본다. 과연 토스카나의 마법에 걸려 어떻게 변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말이다. 혹시 먼저 실천에 옮기신 분이 있다면 경험담을 공유해 주시길······.
* 페렌츠 마테의 이야기는 그의 저서 <토스카나의 지혜>에서 발췌하였다.